지면에 글을 싣는 차례가 돌아오는 한 달 동안은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내내 고민한다.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끊임없이 주제를 바꾼다. 이번엔 유독 더했다. 처음에는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에 대해 쓰려고 했다. 그를 애써 비호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다 한 중학교에서 수업 중 벌어진 학생들의 집단 자위 사건을 쓰려고 했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관계보다 강력한 성별 위계관계를 짚고 싶었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누리꾼의 말이나, ‘집단적이거나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장난이었다’라는, 절대로 반어관계에 놓일 수 없는 말로 어물쩍 비호하려 드는 교육청과 학교 당국의 문제점을 반드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인·연예인 합성 신고 계정’을 본 순간, 그럴 수 없어졌다. 최근 트위터에는 지인이나 연예인의 사진을 포르노 사진과 합성해주는 소위 ‘능욕 계정’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런 계정이 삭제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이 일일이 트위터 본사에 신고를 해야 한다. ‘신고 계정’은 신고해야 할 목록을 한데 모아 사용자 개개인의 수고를 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 역시 이 계정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신고할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텐데 덕분에 손쉽게 신고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짧은 시간 안에 능욕 계정 대부분이 사라졌다.

ⓒ정켈 그림

미디어에 퍼져나가던 폭력에 미디어의 특성을 확실하게 파악한 여성들이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항한 것이다. 멋진 승리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구조적인 폭력을 어디까지 개개인의 선의와 노력에 기대야 할지 암담하기도 했다. 몰래카메라에서부터 ‘능욕 계정’까지, 여성의 신체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침해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몰카나 능욕 계정 따위가 퍼지는 속도와 범위는 빠르고 광대해진다. 오래된 폭력의 새로운 모습에 그저 막연해지는 순간 기발한 대응법이 등장하고,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폭력이 나타나 다시 망연해지고….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여성들은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되던 순간들을 언젠가부터 성폭력이라는 말로 정확하게 불렀다. 흩어져 존재하던 폭력을 한자리로 모았고, 그것을 제재할 법의 테두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등장했고 피해자의 이름을 딴 사건을 가해자의 이름을 붙여 다시 고쳐 부르기도 했다. 피해자에게만 꽂히던 비난의 화살을 가해자에게로 돌리는 데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요즘은 법이 만들어지고도 한참 동안이나 남성 중심적으로 기울던 판결마저 조금씩 뒤집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성들로 하여금 신고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무고죄가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혐의 없음’이 무죄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점점 더 많이 들려온다.

여성들은 그렇게 새로운 성범죄에 함께 대응한다

여성들은 오랜 시간 성폭력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다음 세대를 지켜내기 위해 이미 아주 많은 것들을 해왔다. 하지만 성폭력은 날로 기승을 부린다. 세상의 모든 진보에도 꿈쩍 않고 한 치도 변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술의 발전에 완벽히 적응해 한층 더 교묘해지고 저열해졌다. 여성들은 새로워진 성폭력의 양상에 걸맞은 대응 방식을 개발해내면서 매일같이 치열하게 싸운다. 그런데도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제자리이거나 더 나빠지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탁월한 방법을 생각해내면, 성폭력은 근절될까. 당연히 아니다. 지금의 고통은 여성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폭력은 저지르는 자가 멈추지 않고서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명 이민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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