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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효가 있어다행이야

2017년 08월 10일(목) 제516호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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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권해효씨(사진)는 연기와 사회운동을 오가며 활동한다. 그는 “사회에 헌신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자극을 받고 공부하며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배우 권해효씨의 가방에는 세월호 노란 리본이, 재킷에는 주황색 배지가 달려 있었다. 주황색은 ‘아동학대 금지’를 상징한다. 치마저고리의 옷고름을 본떠 디자인했다. 일본에서는 외국인학교를 포함한 모든 고등학교에 ‘무상화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재일본 ‘조선학교’를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가 대표로 있는 ‘몽당연필’은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다. 몽당연필이 조선학교 차별을 반대한다는 뜻에서 이 배지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몽당연필 회원들과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사업본부 회원들을 위한 작은 공연을 광주에서 가졌다.

지난 5월 영화 <그 후>로 제70회 칸 영화제에 다녀왔다. 홍상수 감독과 함께한 작품이다. 2012년에도 그가 출연한 홍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그때는 일정 때문에 못 갔다. 그즈음 영화 전문지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권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아쉽지만 아내가 더 아쉬워하는 것 같다. 사실 무척 가고 싶었다. 그러나 6월부터 방영하는 드라마 <유령> 촬영도 있고. 무엇보다 재일 조선학교를 위한 ‘몽당연필’ 일 때문에 일본을 다녀와야 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웃음).” 그때 그 말처럼 5년 만에 기회가 왔다. 그것도 영화 <그 후>에 함께 출연했던 아내 조윤희씨와 함께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최근에는 책을 소개하는 ‘교양 예능’ 프로그램 <서가식당> (KBS 1TV)에서 공동 진행자로 나섰다. 7월26일 영화와 방송, 사회운동을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 권해효씨를 만났다.

<그 후>가 상영되는 칸 영화제의 뤼미에르 극장에 들어서는 장면을 보니 눈시울이 젖은 듯 감격하는 표정이었다.

1986년에 영화 스태프로 일을 시작해 30년 넘게 영화 일을 했다. 1895년에 영화를 만든 뤼미에르 형제를 기념하는 극장에서 내가 출연한 영화가 상영되고, 그걸 2000석 넘게 꽉 채운 관객들이 보니…. 경쟁부문에 초청받으면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레드카펫부터 극장까지 에스코트를 한다. 우리는 몰랐는데, 그 과정이 생중계되어 2000명이 넘는 관객이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관객이 일어나 박수로 감독과 배우를 맞이해주는 건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제작비가 1000만원이든, 1000억원이든 영화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대우하는 느낌, 감독과 배우가 예술가로서 대우받는 느낌이 들었다.

ⓒ시사IN 윤무영

칸 영화제에서 인상 깊었던 일은?

공식 일정이 끝나고 아내와 영화제 마켓 등을 다녔는데, <그 후>를 본 사람들과 마주쳤다. 우리에게 “만나서 반갑다”가 아니라, “고맙다”라고 인사하더라. 좋은 영화에 대해 감사한다고. 인상적이었다. 영화제 때 이상호 전 MBC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이 기자는 고교 문예반 후배다. 전 세계 영화제 마켓에서 칸 마켓이 가장 큰 규모인데, 다큐 영화 <김광석> <대통령의 7시간> 판매·홍보 때문에 왔다고 했다. 해직되고 승소했지만 복귀해 사표를 내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위로를 제대로 못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칸의 거리에서 만났는데, 우연한 만남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 후>는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나?

지난해 11월에 열흘 사이로 출연한 영화 세 편(<스플릿>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가려진 시간>)이 동시에 개봉했다. 그런데 그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모든 영화관이 텅텅 빌 정도로 매출이 어마어마하게 떨어졌다. ‘아, 운이 없나 보다’ 싶었다. 11월 말인가, 12월 초에 홍상수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통 때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촬영할 건데 시간 되는지’ 정도 묻곤 했는데,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자기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물었다. 그러다가 12월쯤인가. 작업을 같이하고 싶다고 제안하더라.

홍상수 감독과의 영화 작업은 어땠나?

보통 작업 환경과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나오고 프로듀서가 투자배급사를 잡고 감독이 캐스팅한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놓고 어디에서 힘을 넣을지 뺄지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 영화 현장에서는 A4 몇 장짜리 대본을 받고 촬영한다. 그 상황을 보고서 감독이 그다음 대본을 쓴다. 영화 순서대로 촬영을 했다. 시나리오대로 계획을 세우는 게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사는 일상이 그런가? 바로 1초 후에 이 문을 열고 나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우리 일상인데. 우리가 다음 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고 지금 여기에서는 힘주고 저기에서는 살짝 이야기하고 그러는 게 아니잖은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작업은 일상의 어떤 순간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과정인 듯하다.

홍상수 감독에 대해 ‘현장을 가장 완벽하게 장악하는 감독’이라고 말했는데.

홍상수 감독은 전 세계 영화인에게 ‘소주’라는 두 음절을 귀에 꽂히게 한 사람인데(웃음). 술자리 장면이 많다. 그 장면들이 즉흥적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많은 이들이 오해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단 1초의 애드리브도 없다. 홍 감독은 말과 말 사이의 긴장과 뉘앙스의 차이에 대한 자기 확신과 예민함을 갖고 있다. 술자리 장면도 완벽하게 조율된 것이다. 촬영 전에 대본을 받고 첫 번째 테이크를 찍는다. 그걸 모니터하면서 대사의 틀린 부분을 체크하고, 대사 사이의 간격, 담뱃재 터는 것 같은 동작 하나하나를 조정해가며 열 차례 이상 촬영한다.

배우로서 그런 작업에 긴장하게 되나?

긴장보다는 몰입하게 된다. 오로지 상대의 말에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해 내 말을, 있는 그대로 해내는 수밖에. 그게 끝나고 나면 연기를 했다기보다 내가 그 공간에 존재했다는 느낌이 든다. 배우는 끝없이 뭔가를 만들고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그의 영화에서는 몰입·몰두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이상한 ‘치유’가 느껴진다. 많은 배우가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이유다.

영화를 촬영한 곳이 강출판사 사무실이고, 정홍수 강출판사 대표가 문학평론가다. 극중에 권해효씨가 연기한 출판사 사장 ‘봉완’이 지하철에서 읽는 책이 정 대표의 친구인 고 김소진 소설가의 작품이다. 그런 것도 대본에 미리 준비된 것인가?

전부. 정홍수 대표가 촬영 내내 노심초사했다. 출판계 사람들이 다 자기 이야기로 여기는 거 아니냐며(웃음).
ⓒ연합뉴스
2011년 12월1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에서 ‘몽당연필’ 회원들이 일본의 조선학교 차별에 반대하며 일본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아내 조윤희씨가 함께 출연했는데.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연애 기간까지 하면 28년 동안 함께 지내고 있다. 홍 감독이 ‘권해효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으로 아내가 궁금하다고 하더라. 아내가 처음에는 ‘자신 없다’며 출연 제의를 거절했다. 촬영 일주일 전에 카메라 테스팅 겸 의상 확인을 했다. 홍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배우들이 자기 옷을 입는다. 그때 ‘같이 오면 어떻겠느냐’ 해서 함께 갔는데, 이런 상황이면 둘이 어떤 대화를 할 거 같으냐고 묻더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그때 출연을 결정했다. 대화 일부가 영화 첫 장면에 담겼다. 연극 무대에는 함께 서봤지만 영화는 처음이었다. 영화에서 처음 마주보는 순간의 어색함, 긴장 같은 게 그 장면에 녹아들었다. 홍상수 감독이 첫 장면을 무척 좋아했다. 그 장면 찍고서 다음 이야기가 잘 풀려나갔다고.

영화 일은 언제 처음 했나?

1986년 대학생 때 미술소품팀 스태프로 일했다. 김유진 감독의 <영웅연가>다. 길용우·송옥숙 주연이다. 그때 제작실장이 지금 씨네2000의 이춘연 대표(영화인회의 이사장)다. 첫 번째 영화 현장을 그렇게 경험해서인지 지금도 현장에 가면 미술과 소품을 담당하는 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회운동과는 어떻게 연이 닿았나?

1997년쯤 구로시민센터라고 구로 지역의 노동자들이 하는 연극교실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즈음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친구가 청소년단체 캠프에서 연극교실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변영주 감독이 ‘양심수 석방을 위한 감옥 체험’을 해달라기에 명동성당 입구에서 ‘감옥 체험’을 했다. 대학 시절에는 공연하느라 사회운동의 방관자처럼 지냈다.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고, ‘내가 정말 세상에 대해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 마음에 천주교인권위원회 행사에 혼자 조용히 가보기도 했다. 드라마 촬영 때는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 1997∼1998년에 방송사 1층 서점에서 책을 사 그 시간에 읽었다. 그 당시에 가장 뜨거운 글을 쓰는 이들은 누가 뭐래도 강준만·진중권·김규항이었다. 그들의 글에서 많이 배웠다. 그러다가 2001년에 영화인 ‘안티조선’ 선언을 했는데, 시민사회단체에서는 그걸 일종의 ‘커밍아웃’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때 ‘배우 직능 대표’처럼 되어버려서 여러 자리에 나서야 했다. 선언만 하면 뭐 하나, 알려야지. 이후 일종의 1인 언론개혁 운동 한답시고 전국 대학에 강연을 많이 다녔다. 그런 다음에 한국여성단체연합,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사업본부 등에서 연락 오고. 호주제 폐지, 북녘어린이 빵공장 등과 관련해 ‘보따리 장사(강연)’를 많이 했다.

지금도 <조선일보> 계열 언론과는 인터뷰를 안 하나?

가끔 TV조선에서 섭외 오는데, 안 한다. <조선일보>에서는 연락 안 온 지 꽤 됐고. 연락이 오면 ‘<조선일보>와는 안 한다’고 거절한다.

사회적 발언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런 걸 걱정했으면 활동을 많이 못했겠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내레이션을 녹음했는데, 박근혜 당선 이후 ‘데미지’가 굉장히 세구나 싶기는 했다. (블랙리스트나 드라마 섭외 제한 등에 대해서는) 그냥 결국 내 실력의 문제로 생각하는 게 나은 것 같다.

지난해 겨울 촛불집회 때 무대에 안 섰는데.

틈날 때마다 가족과 나와서 광화문 한구석에 앉아 지켜보았다. 무대에 올라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때는 3주 내내 무대에서 사회를 보았다. 그때는 수많은 인파가 오와 열을 맞추어 앉았다. 화장실 가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조직화된 집회였달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사태’ 때의 촛불부터 변화가 느껴졌다. 종교계부터 시작해 학생, 시민들이 다 섞여 있었다. 세상이 달라지고 좋아졌다. 2016년 촛불 때 내가 무대에서 무슨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김제동씨처럼 꾸준히 공개적으로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발언해온 이들이 무대에 올라 이야기를 해야지, 과거에 무엇을 했다는 이유로 내가 올라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꼰대짓’이라고 생각했다. 2004년 생각도 났다. 그때 수많은 시민들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힘을 갖고 있었음에도 끝내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두 사람, 명계남과 문성근. 무대에 오르는 순간 친노니, 노빠니 촛불집회가 공격받기 쉬울 것이라는 걸 알고 두 사람은 사양했다. 두 선배가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을까, 이번 촛불 때 예전 생각이 났다.

ⓒEPA
제70회 칸 영화제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왼쪽에서 네 번째)의 신작 <그 후>의 출연진.

‘조선학교’에 관심이 많고 ‘몽당연필’ 대표도 하고 있는데.

2011년에 일본 동북대지진 때 조선학교 두 군데가 큰 피해를 당했다. 조선학교에 관심이 많았던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1년 기한을 잡고서 작은 공연을 열어 기금을 만들었다. 그 후에 그 모임을 끝내기는 아쉽다는 말이 나왔고, 2012년에 시민단체로 만들었다.

이름이 왜 몽당연필인가?

몽당연필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김명준 감독(<우리학교> 연출)이 제안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소중했던 것들을 뜻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미지도 있다. 그렇게 이름을 정했는데, 일본인들이나 재일동포가 발음하기를 어려워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는 ‘몽당연필’을 뜻하는 단어가 없다. 그냥 ‘짧은 연필’이라고 한다. 몽당연필 대표 명함을 주면 (ㅇ받침 때문에) 발음하기 어려워한다.

어떤 활동을 주로 하나?

회원이 500명가량이고, 회원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매달 교육 프로그램을 연다. 서울 연남동에 카페도 운영하고, 조선학교 지원을 위한 공연도 한다. ‘당신들을 기억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학교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 조선학교만 고교 무상화에서 제외되면서 일본의 300여 시민단체들이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연락회’를 만들었다. 몽당연필이 일본의 양심세력인 이 단체들의 파트너로 교류한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통일을 열망한다. 차별의 근본은 한반도 분단이니까. 몽당연필의 움직임을 새로운 형태의 통일운동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선언하고 외치는 운동이 아니라 같이 어울리고 공감하는 일을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지난 정부 때는 제약이 많았다. 학생 절반이 대한민국 국적인데도 조선학교 방문을 못하게 했다. 통일부에 접촉 승인서를 내면 아예 접촉 신고를 거부해버렸다. 후쿠시마에 있는 조선학교에 갔을 때는 학생들을 불러내 교문 옆 담벼락 밑에 앉아 고기를 구워먹기도 했다. 앞으로는 달라지겠지.

포털에서 ‘권해효’라고 치면 배우· 사회운동가라고 뜨는데, 맞는 말이다(웃음).

포털에 연락해 고쳐달라고 해야겠다(웃음). 사회운동가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것 같고, ‘사회운동 응원가’쯤이 좋겠다(웃음).

배우로서 연기와 사회운동을 오가는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만약에 연극·영화·방송 관계자들, 연출가, 배우들과의 관계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내 삶이 썩 재미있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배우들은 평생 가도 못 만날 분을 많이 만났다. 배우로 살아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된 듯하다. 살면서 매우 듣기 좋은 말이 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훨씬 더 좋아지고 있다.’ 그럴 수 있다면 무척 복 받은 일이다. 이 땅에 사는 중년 남자가 어제의 나보다 오늘이 훨씬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으니, 그런 면에서 좋다. 사회에 헌신하는 이들을 만나 자극을 받고 공부하게 되면서 그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행이다.


인터뷰 말미에 권해효씨는 “2017년 상반기는 기분 좋게 시작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대선이 있었고, 칸 영화제도 있었다. 막혀 있던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인터뷰 이틀 뒤인 7월28일, 조선학교를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에서 배제한 일본 정부의 조치가 위법하다는 일본 법원의 판단이 처음으로 나왔다. ‘몽당연필’ 페이스북에 접속해보니 승소 소식에 일본 법원 밖에서 얼싸안는 시민·재일동포들의 사진이 보였다.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권해효가 있어, 몽당연필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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