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셔, 의사 양반?(What’s up, doc?)”

1940년 7월27일 〈어 와일드 헤어(A Wild Hare)〉로 데뷔한 이후 벅스 버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왔다. 〈루니 툰〉 시리즈에서 벅스 버니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앨버커키에서 좌회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엉뚱한 장소에 도착한다. 잇달아 사건이 벌어지지만 벅스 버니가 거침없이 해결해나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 야생 토끼는 위험한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주 여러 모습으로 변장한다. 변호사가 되어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 속내를 드러내게 만들기도 하다가 결국 승리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루니 툰〉 시리즈에서 벅스 버니는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장하고 상대방을 유혹하기도 한다. 여장을 한 벅스 버니는 어떤 이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자신을 해치려는 캐릭터를 곤경에 빠뜨리는 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여장을 하고’ 무장 해제시켜버리는 이야기라니, “벅스 버니는 내 첫사랑이었다”라는 누군가의 고백처럼 이 에피소드와 벅스 버니가 준 충격은 상당했다.

벅스 버니는 이전에 나온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주인공들과 달랐다. 권선징악이 뚜렷하고 소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건전한 내용만 보여주었던 디즈니의 〈미키마우스〉 시리즈나, 한집에 사는 쥐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고양이 얘기인 한나 바버라의 〈톰과 제리〉 시리즈와 달리, 벅스 버니가 나오는 〈루니 툰〉 시리즈는 설정과 내용을 끊임없이 변주시켰다. 그 안에서 벅스 버니는 때로 ‘제4의 벽’을 넘기까지 하면서 활약했다. 만화 속 등장인물임에도 전지전능한 신 같은 벅스 버니의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우일 그림

사람들은 권선징악에서 벗어난 이야기라 좋아했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벅스 버니가 쉽게 해결해 나가므로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이렇게 벅스 버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래도 공통점을 찾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사건을 헤쳐나가는 모습에서 느끼는 쾌감일 것이다. 벅스 버니는 욕망을 대신 실현해주거나 숨겨진 내면의 자아와 같은 존재였다.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성적 지향성과 비정상이라고 정의 내려지던 취향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벅스 버니는 암울했던 시절 성 소수자의 열광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현시점에서 예전 〈루니 툰〉 시리즈를 보면 달리 해석할 대목도 적지 않다. 지금 잣대로 보면 실상 성 소수자와 여성 비하, 인종차별·자살 방조 등, 유머로 포장했다 해도 불공정한 내용이 상당수이다.


욕망을 대신 실현해주고 숨겨진 내면의 자아를 드러내주던…

21세기에도 〈루니 툰〉과 벅스 버니가 등장하는 새로운 시리즈는 계속 나오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알던 옛날의 〈루니 툰〉 시리즈와는 많이 다르다. 〈루니 툰-벅스 버니와 대피 덕〉에서 벅스 버니는 대피 덕이 친 사고를 수습하는 상식인이고, 〈웨빗(Wabbit)〉은 예전 〈루니 툰〉으로 회귀했다고 하지만 벌어지는 사건들은 장난 수준에 불과하다. 심지어 자기 시리즈 안에서 “여장하는 거 불편하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한다.

벅스 버니가 가졌던 상징성은 이제 효력을 다한 걸까. 세상이 변했으니 더 이상 의미 없는 존재일까. 글쎄, 벅스 버니가 보여줬던 모습들을 두고 시대적 한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벅스 버니가 자신을 드러내고픈 욕망을 실현해주는 걸 보고 만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현실 세계에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 밖으로 나와서 편견과 맞선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벅스 버니한테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벅스 버니로 인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되어주었다. 이들을 또 다른 벅스 버니, 새로운 벅스 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말해본다. 벅스 버니는 유효하다. 벅스 버니가 여전히 필요한 세상이라면 그 의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That’s all Folks!)”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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