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호출은 영광이었다. 장관이든 정치인이든 그와의 식사 자리를 원했다. 불법 혐의가 짙은 회장님의 사업에 관리감독 기관은 속수무책이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다. “눈만 감고 계시면 됩니다.” 감독기관 최고 책임자는 “이렇게 말입니까, 이렇게”라며 눈을 찔끔 감는 시늉을 한다. 충성 퍼포먼스에 자식들의 삶까지 보장된다. 회장님은 검찰과 경찰의 인사에도 관여한다. 요직에 있는 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될성부른 떡잎은 장학생으로 키워 요직에 앉힌다. 회장님은 “우리가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라고 큰소리친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비밀의 숲〉(tvN)에 그려진 한조그룹의 모습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끈 건, 탄탄한 시나리오 덕분일 것이다. 시청자들은 허구의 드라마에서 리얼리티를 본다. 한조그룹에서 현실의 어떤 재벌 권력을 읽는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에 어떤 기업의 어떤 인사가 주고받은 문자를 전격 공개한다. 법정에 증거로 채택된 날것 그대로다. 주진우·김은지 기자에게 처음 보고를 받고 한조그룹이 떠올랐다. 한조그룹 이윤범 회장의 얼굴에 어떤 인물이 겹쳤다. 두 기자가 쓴 커버스토리를 읽다 보면 한조그룹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도 느낄 것이다. 


언론사·청와대·국정원·검찰·법원·국회 등 힘깨나 쓴다는 ‘기관’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어떤 기업의 대관업무 최고 책임자에게 은밀하게 인사 청탁을 하고 정보 보고를 한다. 자신뿐 아니라 자식들 취업도 부탁한다. 노골적으로 “존경하옵는 사장님”이라며 납작 엎드렸다. 언론계 인사들의 문자를 읽고 있자니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어떤 기업 총수의 1심 재판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막판 법정에서 드라마가 펼쳐졌다. 구속된 총수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임원들이 자신에게 죄가 있다며 앞다투어 ‘육탄 방어’ 증언을 했다. 그들의 증언을 듣고 있자면 드라마와 현실이 혼동될 지경이다.

그나마 이런 민낯이 드러난 건 드라마 속 황시목 검사와 비슷하지는 않더라도 경제 권력 앞에서 눈을 감지 않았던 검사·특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정의롭거나 착해서가 아니다. 권력에 민감한 검사들의 뇌섬엽(감정 조절과 관련된 뇌의 영역)을 제거시킨 건 광장에서 촛불을 든 주권자들이다. 주권자의 외침이 권력에 엎드리던 검찰의 행태를 조금이나마 교정해주었다.

정권 교체만으로 모든 게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는다.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고, 나쁜 언론을 보지 않고, 하다못해 페이스북 등 SNS에 비판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검찰은 또다시 살아 있는 권력에, 경제 권력에 눈을 감을 것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현실의 어떤 기업은 삼성이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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