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 후 조사를 받거나 기소가 되어 재판을 하다 보면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받는 질문이 있다. 상담하는 과정에서 미리 점검하는데, 그 질문들을 들여다보면 꽤나 씁쓸하다.

“왜 가해자와 단둘이 술을 마셨나요?” “왜 가해자와 밀폐된 노래방을 갔나요?” “왜 문을 열고 도망치지 못했나요?” “왜 좀 더 저항하지 못했나요?” “왜 사건 직후 화를 내거나 항의하지 못했나요?”….

유독 성폭력 사건이 그렇다. 피해자는 충분한 정도의 예방조치를 했으며, 최선을 다해 범죄를 당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내용의 소명을 요구받는다. 도둑맞은 이에게는, 문을 잘 잠그지 않아 도둑이 들었으니 그 잘못이 피해자에게 있다고 하지 않는다. 상해를 입은 이에게, 가해자를 화나게 했으니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는 다르다. ‘나는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라고 입증해야 한다. 이 부분을 검사에게 납득시키지 못하면 성폭력 가해자는 기소조차 되지 않는다. 검찰이 기소하더라도 판사에게 재차 납득시키지 못하면 ‘합리적 의심을 뛰어넘을 정도의 입증이 되지 않았다’며 가해자는 무죄판결을 받기도 한다.

ⓒ정켈 그림

타인들의 ‘왜’를 납득시키지 못한 피해자는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일이 성폭력이 아니라는 선언을 마주하게 된다. 피해자들이 잘못해 이 모든 일이 생겼다는 ‘낙인’을 평생 떨칠 수 없다. ‘왜’를 이해시키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질문 과정에서 받은 충격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는다. 


최근 이런 ‘왜’에 좌초된 여러 사건의 항소심을 맡고 있다. 한 대학원생이 지도교수의 친한 친구한테 강간당했다. 피해자는 연구실에서 여러 날 밤새워 과제를 하느라 지쳐 있었고, 가해자의 집요한 요구로 나간 저녁 자리에서 술을 마셨다. 심야의 한적한 주차장 구석에 세워진 가해자의 차에 탔다가 강간을 당했다. 유부남인 가해자는 성추행 전력도 있었다. 피해자는 학업을 중단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여러 번 손목을 그었다.

1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는 장장 5시간의 증인신문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왜’와 만났다. ‘왜 동맥 대신 정맥을 그었느냐’라는 질문까지 받았다. 울면서도 끝까지 노력했던 피해자는 지쳤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가해자의 강제성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과정은 피해자 옆에서 지켜보는 변호사에게조차 상처였다. 지엄한 법정에서 쏟아진 각종 ‘왜’라는 질문은 형체만 없을 뿐 가시가 달린 매였다. 법정다툼이 1년간 이어졌는데, 변론기일 때마다 당사자도 아닌데 매번 온몸이 아팠다. 그런 나도 피해자에게 사전에 수많은 ‘왜’를 물었다. 증인신문을 가기 전에 ‘왜’에 대해 질문과 답을 주고받고 리허설을 했다.

‘주의 의무 다했음’을 소명해야 하는 성범죄 피해자

전보다 성폭력 사건의 기소나 합의 비율이 높아졌고 재판에서 가해자를 응징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전보다 마음이 편해졌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려면, 성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전방위로 방어 태세를 취해야 한다. 성폭력을 당한 후에는 완벽한 피해자가 되어야 한다. 성폭력을 당한 뒤 너무 밝아도 안 되고 남자와 술을 마시거나 태연히 데이트를 해도 안 된다. 대체 언제까지 피해자가 ‘나는 성범죄를 당하지 않을 주의 의무를 다했음’을, ‘공포 속에서도 최선의 저항을 하였음’을, ‘피해를 당한 후에는 피해자답게 행동했음’을 소명해야 하는 걸까.

변호사로서 나는 오늘도 피해자들을 앉혀놓고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왜’를 먼저 묻는다. 또다시 한숨이 나온다.

기자명 이은의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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