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아 다소 한산해진 대학 캠퍼스를 바쁘게 오가는 이들이 있다. ‘학문 후속 세대’라 불리는 대학원 학생들이다. 취업을 미루고 대학원을 임시 정거장으로 삼은 석사 과정 1년차부터 갓 부임한 30대 조교수와 동년배인 박사 학위 예정자까지, 많게는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청년들이 한 연구실에서 생활한다. 대학생 시절 조교실에서 마주친 대학원 선배들은 왠지 모를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세월이 흘러 교직원의 눈으로 바라본 대학원생들은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끼인 경계인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공대 대학원생 몇 명과 둘러앉아 신세 한탄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는 보장됐으면 좋겠다” “휴가 가보는 게 소원이다” “교수님이 주말에는 일 좀 안 시켰으면…”. 매일 아침 연구실로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한다는 이들의 언어는 회사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샐러리맨처럼, 학생들은 지도교수가 수주한 연구 과제에 연구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참여율과 기여도에 따라 인건비와 인센티브를 받아 생활하고 있다. 매출(연구비)이 큰 회사(연구실)의 사장님(지도교수)을 만나야 월급(인건비)이 끊이지 않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구조다. 장학금만으로 생활이 어려운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수업 조교로 일하거나 지도교수가 수행하는 외부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권위적인 사제 관계에 짓눌린 연구실 문화

ⓒ김보경 그림

학생들은 무엇보다 지도교수 개인 성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연구실 생활의 불확실성과 폐쇄성 때문에 답답해했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교수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라는 한 학생의 말에 대학원 연구실을 ‘교수가 지배하는 소(小)왕국’에 비유하던 동료 교직원의 뒷말이 떠올랐다. 졸업 시기는 물론이고 출퇴근 시간, 휴가, 인건비 등 대학원 생활 전반이 지도교수에 의해 결정되는 연구실 환경에서 도전적인 질문과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을 수 있을까.


대학원생은 그동안 대학 입시와 대학생 이슈에 밀리고 학생 수도 적은 까닭에 대학과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내 딴에는 도와주려는 마음에 “부당한 처사나 대우가 있으면 학교 측에 즉시 알려달라”고 말했지만 냉소에 찬 목소리가 돌아왔다. “신문고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나요? 사안이 크고 심각해야만 반응하잖아요. 자체적으로 스크린한다던데. 그래서 자질구레한 일들은 그냥 넘어가는 거죠 뭐.”

교수 자신도 대학원에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묵묵히 견뎌냈다고 말한다. 지도교수와 함께 일하고 공부하면서 장학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외국 유학생활 이야기를 들려주며 편한 것만 찾고 치열함이 부족한 학생들의 정신 상태를 에둘러 지적하기도 한다. 또 교수들이 “대학원에서도 실습형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데 일리가 없지는 않다. 교수를 도와 자료를 찾고 연구 제안서도 써보고 다른 연구자들과 협업하는 과정을 통해 대학원생들은 연구자로 독립한다. 그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선후배 관계가 아니라 종속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게 문제다. “지나고 보니 도움이 됐다” 식의 결과론은 권위적인 사제 관계에 짓눌린 한국식 연구실 문화를 은폐할 뿐이다.

공부와 노동, 학습과 연구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에 걸쳐 있는 대학원생들의 권익을 해치는 여러 관행이 자리 잡고 있다. 연구실 운영의 폐쇄성을 자율성으로 포장하고 서로 싫은 소리 하기를 꺼려하는 교수 사회의 외면, 대학 본부의 무관심과 사후약방문 식의 대응에도 책임이 있다. 교수들과 대학은 연구실 문화를 바꾸기 위한 실효성 있는 구체적 해법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

기자명 이대진(필명∙대학교 교직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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