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91)가 눈을 감았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이다. 올해 광복 72주년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광복은 아직도 먼 이야기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28일 아베 정부와 일본 정부의 이행을 전제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라고 합의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 엔도 ‘배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합의 뒤에도 아베 총리는 ‘전쟁범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 증거는 없다’ 등 합의를 무색하게 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후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남았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를 발족했다. 연말까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에 관해 사실관계를 확인·평가하고 결과를 공개할 계획이다. 생존 위안부 할머니의 대표주자 격인 김복동 할머니(91)를 서울 마포구 연남동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쉼터에서 만났다.   
 

ⓒ시사IN 조남진올해 91세인 김복동 할머니는 중국(광둥)·홍콩·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싱가포르로 끌려다니며 8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처음에 어떻게 ‘위안부’로 끌려갔나?

그때는 식민지 시대였으니 일본이 자기들 마음대로 했거든. 시골 각 군·면마다 군수공장에서 일할 처녀 몇십명씩 모집한다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어. 시집갈 나이가 찬 처녀들은 재빨리 머리를 올려야 하는데 신랑감이 없었어. 그때만 해도 젊은 남자들이 보급대니 징용이니 다 끌려가서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돈 없어서 장가 못 가는 노총각, 남의 집 머슴살이하는 사람, 몸이 불구가 돼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뿐이었어. 그런 사람하고라도 서둘러 결혼하려 했지만 그나마 구하기도 힘들었지.

누가 집으로 찾아와서 데려갔나?

그때만 해도 군수니 면장이니, 뭐 사무 보는 직원들이니 전부 일본 앞잡이잖아. 일본한테 잘 보여야 자기들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해서 연필 거머쥔 사람들이 맘대로 명단을 작성했지. 자기네 일가친척은 다 빼고 나니 할당 인원수가 모자라는 거야. 그러니까 농부 딸들 중에 나이 어린 소녀까지 무조건 끌고 갔어. 나는 그때 열네 살이라 끌려갈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 그런데 하루는 조선 사람하고 일본 경찰관 한 사람,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일본 사람, 이렇게 셋이 우리 집에 찾아와 엄마를 협박했어.

어떻게 협박했나?

지금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군인들이 입을 옷 만들 처녀가 부족하다. 그러니 딸을 일본에 있는 군수품 공장에 무조건 보내야 한다고. 엄마가 “자기 옷 하나 못 해 입는 어린애가 어찌 군인 옷을 만들 수 있겠느냐”라며 못 보낸다 하니까, “가서 배우면 된다. 만약 이번에 거역하면 일본을 반대하는 집으로 찍혀 살림 몰수할 수도 있다”라고 협박했어. 가만 생각해보니까 공장이라는 곳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나, 나 하나만 희생하면 가족이 편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엄마한테 공장에 따라가겠다고 했지.

처음에 공장으로 데려가던가?

저 남양 쪽 전쟁터로 바로 끌고 간기라. 낮에는 미군이 폭격할까 봐 배가 못 가고 섬 근처에 숨어 있다가 밤에 가기를 여러 날 했지. 먼저 광둥이라는 데에 내리니까 군인들이 우리를 맞았어. 아주 높은 계급까지 사령부에서 나와 쭉 앉아서 검사를 하더라고. 손도 벌려보라 하고 얼굴도 쳐다보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라 해서 들어가니 군의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몸수색과 검사를 하더라고.

몇 명이나 끌려갔나?

그때 내가 간 데는 서른둘인가 됐어. 조선 팔도에서 끌려온 순진한 처녀들이었지. 중국 여자도 한 명 있었고.


군수공장이 아니라 위안소라는 걸 언제 처음 알았나?

군의관이 신체검사를 한 뒤 숙소로 가라 해서 배정된 숙소로 가니까 군인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이 돼 있는 거야. 어떻게 그 전쟁터에 민간인이 들어가서 그런 시설을 다 만들어놨겠어? 시설을 보니까 이미 일본 군대에서 조선 처녀 몇 명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더라고. 그러니까 인원수 맞춰서 방을 만들어놨지. 지금 일본은 군대가 위안부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위안부’ 생활 외에 모든 자유는 박탈됐나?

다른 것 생각하고 구경 다닐 겨를도 없었지만 말도 안 통하는 타국인 데다 전쟁터라서 막사 주변 민간인들은 대부분 피란 가고 집이 텅텅 비어 있었어. 평일도 그렇지만 주말은 더욱 힘들었어. 토요일은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군인들을 받았고, 일요일엔 아침부터 밤까지 줄 서서 기다리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어. 저녁 먹고 나서 장교들이 나와서 또 그러고. 처음에는 반항하다가 포기했어. 일본군 부대 따라다니며 부대가 만들어준 막사에서 일하는데 헌병들이 서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끝나면 막사를 철거했어. 우리는 먹을 것도 군부대에서 갖다가 먹고.

나라가 원망스럽지 않았나?

누구한테 원망을 하겠나? 말할 곳이 없는데. 기가 막혀서 죽으려고 애를 써봤지만 죽기도 힘들더라고. 힘들어서 반항하다가 말 안 듣는다고 맞기도 많이 맞았지. 날이 가고 달이 가도 그런가 보다 하면서 날짜 가는 것도 모르고 살았어. 처음에 광둥에서 시작해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순서대로 끌려다녔어. 그렇게 8년 동안 일본군 노예로 붙들려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 거지.

ⓒ연합뉴스2013년 9월1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광복은 어디에서 맞았나?

싱가포르에서 일본이 패망한 걸 알았어. 그때부터 조선 여자들을 위안부로 데리고 다녔다는 게 알려질까 봐 일본 놈들이 우리를 간호사로 가장해버리더라고. 일본군 육군병원으로 끌고 가서 나이 많은 언니들은 주방에서 일 시키고 우리처럼 젊은 여자들은 간호 훈련을 해서 병동마다 배치했어. 약도 타다 주고 주사도 놔주고 피 묻은 군복도 빨고 하다가 미군이 상륙하려 하니 다급해져서 병원을 빨리 철거하라 하고는 우리한테는 마음대로 갈 곳으로 가라고 했어.

그래서 탈출했나?

마음대로 가라고 했지만 낯선 곳에서 어디를 가겠나. 미군들이 상륙하자 전부 포로로 붙잡혀 미군 수용소로 갔지. 미군이 조사하더니 조선 여자는 따로 분류하고는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있으면 조선으로 보내준다고 했어. 당시 우리 위안부뿐 아니라 남방 전선에 징병으로 끌려온 조선 남자들도 미군 포로수용소에 많이 오더라고.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구분돼 수용소 생활하다가 집으로 보내줬어.

 


그때가 언제인가?

나이도 몇 살 먹었는지 모르겠고 그냥 일본군 이동하는 데마다 끌려다니다 보니까 얼마나 갔는지도 모르겠고. 집에 가니 나이가 스물두 살이라고 그러더라고. 2년 있다가 6·25 전쟁이 났으니까 1948년이었던 거 같아.

가족도 위안부로 간 사실을 알았나?

식구들은 내가 죽은 줄 알았대. 징용으로 끌려간 형부를 따라 언니가 일본에 들어갔는데, 그때 조선 여자들이 남양 쪽으로 많이 갔다는 말을 들은 언니는 내가 안 돌아오니까 남양 쪽에서 죽은 것 같다고 집에 알린 거지. 살아서 돌아오니까 일본 군수공장에서 일한 것으로 알지, 위안부였는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

가족에게도 위안부 피해자라고 안 알렸나?

그 누구한테도 말을 못했는데 엄마한테는 할 수 없이 이야기했지. 귀국 후 망가진 몸이 조금 회복되니까 집에서 시집을 가라는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만 “군수공장이 아니고 일본군 정신대로 끌려다니다 여자로서 몸은 완전히 부서졌다. 어떻게 남의 신세 망치려고 시집을 가겠느냐, 시집 못 간다” 하고 버텼지. 그러자 엄마가 처음엔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딨노. 거짓말하지 마라”고 하더라고. 딸이 실제로 당했고 자궁도 파열돼 시집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엄마가 앓기 시작했어. 엄마도 우리 딸이 그런 데 갔다 왔다고 어디에 말하겠나. 엄마는 속으로 자식을 낳아서 자기가 관리를 잘 못했다고, 죽어서 저승 가면 조상들을 어떻게 보겠냐고 한탄하시다 화병을 얻으셨어. 그렇게 고생하다가 끝내 돌아가셨지.

그 뒤 어떻게 살았나?

고향 양산에서 농사짓고 있다가 6·25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밀양까지 내려오는 바람에 부산으로 피란 갔어. 다대포해수욕장 근처에서 내 손위 언니가 장사를 하고 있어 거기서 나도 장사를 배워서 이후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장사하며 살았지. 환갑 나이까지는 일제 때 당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

위안부 이력을 공개한 시점과 그 이유는?

예순한 살 먹을 때까지는 공개를 못했어. 1992년 텔레비전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는다고 해서 그때 신고했지. 나도 가정이 있었더라면 끝까지 신고하지 못했을 거야. 신고한 사실이 신문에 나오면서 자연히 나라는 게 알려지더라. 알려지니까 여기저기서 “아이고, 할머니가 거기 갔다 온 줄 몰랐는데 거기 갔다 온 할머니라매” 그렇게 수군거릴 때 많이 힘들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억울하게 끌려가서 결국 평생 결혼도 못하게 몸이 절단 나는 억울한 피해를 당한 건데…. 일반 사람들은 예사로 그런 말을 하지만 나는 진짜 속이 많이 아프더라.

그때부터 위안부 피해 당사자로서 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많이 세상을 떠났지만 1990년대만 해도 할매들이 많이 살아 있었어. 정대협이 흩어져 숨어 살던 할매들을 찾아내 운동을 시작했어. 처음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할 때 시민은 없고 할매들하고 징용·징병당한 사람 가족들만 200~300명씩 모여서 데모를 했지. 그때는 시민들이 지나가다 “뭔 자랑이라고 그러냐”며 비웃더라. 그럴 때 가장 속상했어. 나라만 튼튼했더라면 우리가 왜 끌려갔겠나. 나라가 힘이 없어서 결국 힘없는 여자들이 끌려가 희생을 당했으면 나라에도 책임이 있다고 싸웠는데 손가락질 받을 일인가.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나?

요새는 응원을 많이 해준다. 국민들도 많이 도와주고 민간단체들도 후원해주고. 전국에서 중고등학생 손자 손녀들이 찾아와 위로해줘. 그 학생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 소녀상도 세우고, 정대협이 피눈물 나게 고생해서 박물관도 만들었어.

ⓒ연합뉴스2015년 11월2일 아베 일본 총리가 청와대 방명록에 서명하는 모습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최근에 할머니 명의로 ‘김복동 장학금’도 만들었는데?

내가 한창 공부할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으니 공부 못한 게 한이 됐어. 만약 일본에서 배상금이 나오면 돈 없어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 학자금으로 보태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지. 그런데 나이 90이 넘도록 해결이 안 되니 언제 죽을지 몰라서 작년에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털어서 일본 내 민족학교 장학금으로 내놨어. 내가 앞장서니까 후원자들이 많이 후원해주셨고. 일본에서 재일동포 자녀가 다니는 조선학교가 차별을 받는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 그 아이들을 돕고 싶었어.  

박근혜 정부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동안 할매들이 나서서 일을 했으니까 같은 여자로서 대통령으로서 아베한테 사죄만 받아와라 했다. 박근혜가 제대로 된 대통령이라면 우리를 만나기라도 했어야 하고, 만나기 싫으면 문제 해결하려고 운동하는 사람들이라도 만나서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겠냐고 물어야지. 그랬더라면 서로 답이 안 나왔겠나. 그런데 한마디 말도 없이 아베랑 쑥덕쑥덕하더니 타결했다더라. 그런 합의 안 된다고 할매들이 반대했건만 끝끝내 돈을 받아서 재단을 만들더라.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재검토한다는데?

해결한다고 공약을 했으니 두고 봐야지.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 가만 보니 우리 기대에 어긋나는 게 있더라.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돈을 받아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없애달라고 요구했지만, 없애지 않고 그냥 사람만 바꿔 계속 운영하기로 했다는 말이 들려. 지켜봐야지.

지난 7월6일 강은희 전 여성부 장관에게 호통을 쳤다는데?

물러나는 박근혜 정부 장관이 여기 올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거든. 새 장관이 장관 됐다고 인사하러 오는 줄 알고 바로 맞이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자기는 임기 끝났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속았구나 싶어 막 퍼부어댔어. 제대로 일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장관이라고 앉아 위안부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했다고 호통쳤다.

강은희 전 장관의 반응은?

아베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했다는 거야. 편지를 써서 사죄하고, 기자들 모아놓고 사죄했다고 하기에 피해 당사자인 우리가 모르는 사죄가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 미안하다면서 도망치듯 나가더라.

올해 광복 72주년을 맞는 감회가 어떤가?

국민들은 해방됐다고 좋은 날이라 하지만 우리 할매들은 아직도 해방이 안 됐다고 봐. 우리는 큰돈을 바라서 싸우는 거 아니야. 지금 국민 중에는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았지만 돈을 주니 좋은 일 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거는 엄연히 역사의 일이지. 우리는 어떻게 됐든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자기들이 한 일이라고 인정하고 사과를 해서 우리 명예가 회복되기를 원할 뿐이야.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과 공식 사과에 여전히 미온적인데?

증거가 나오는데도 자꾸 안 했다고 하는데 살아 있는 할매들이 증거야.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해? 내가 살아 있고, 피해를 본 할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아니라고 거짓말하니 우리 피해자들은 두 번 무시당하고 짓밟힌 기분이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해. 완전하게 해결을 지어야 저승 가서 먼저 간 친구들한테 큰소리하고 만날 거 아닌가.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