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후 유럽사에서 한 가문의 이름은 독보적으로 드높다. ‘합스부르크’ 가문이야. 16세기 카를 5세 시절에 유럽의 태반을 지배하는 전성기를 누렸고,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오스트리아와 중부 유럽을 지배했던 이 가문은 패전 후 왕위를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단다. 뜬금없이 왜 유럽 가문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본의 아니게 우리 독립운동사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기 때문이야. 어리둥절하지? 들어봐.
오늘날 유럽의 체코나 슬로바키아 역시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어. 오스트리아 제국에 반대한 체코인들은 러시아로 망명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추축국에 맞선 의용군을 조직했지. 또한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됐다가 포로가 된 체코 출신 군인들이 대거 반(反)오스트리아 대열에 동참하면서 수만명에 이르는 체코 군단이 러시아군을 도와 독일·오스트리아와 싸우게 돼. 그런데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새롭게 세운 공산 정부는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발을 뺀단다. 문제는 체코 군단이었어.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기를 열망하던 그들은 계속 독일·오스트리아와 싸우기를 원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그들의 활약을 원했지만 이미 전쟁판 걷어치운 러시아의 새 정부, 즉 소련 정부로서는 그 희망을 들어줄 수가 없었어. 체코 군단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그 길도 만만치 않았지. 소련 정부는 “독일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갈 수는 없으니 러시아를 횡단해서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태평양 건너 대서양 넘어 돌아가라”는 제안을 하게 돼. 체코 군단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기차 수천 량에 나눠 타고서 동쪽으로 달려가게 돼.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체코 군단은 많은 무용담을 남겨. 적군(赤軍), 즉 소련 공산군이 섣불리 체코 군단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자 체코군은 간단하게 적군을 무찌르고 한 도시 일대를 점거하기도 했고, 러시아 백군(白軍)을 도와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지. 그들의 열차에서는 체코어 신문이 발행됐고 우체국이 운용되었으며, 탈취한 금괴들과 병사들의 아내나 연인들까지 잔뜩 실려 있었다고 해.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았고 협상 끝에 안전한 귀국을 허락받았어. 그때 그들에게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어.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조직원들이었지. 그들은 체코 군단에게 이제는 필요 없게 된 무기를 팔라고 간청한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당신들처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이오.” 당시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던 이범석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어.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 식민 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이범석, 〈우둥불〉).” 2009년 한국 주재 체코 대사였던 올샤 대사는 한 인터뷰에서, 체코군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주둔 일본군이 독립운동을 하는 수백명의 조선인을 체포해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마치 짐승들에게 총격을 하듯이 길거리에서 그들을 사살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을 남겼음을 소개하기도 했어(〈경향신문〉 2009년 2월25일).
체코의 골동품 시장에는 종종 당시 무기 대금으로 받았으리라 추정되는 금비녀, 금반지, 비단 보자기 등이 흘러나왔다고 해. 놋요강 같은 물건도 끼어 있었다는구나. 추정컨대 독립군들은 요강 속에 금붙이들을 숨겨서 가져갔던 것 같아. 상상해보렴. 무기 몇 정 얻으려고 여인들로부터 금비녀를 거두고 가락지를 모아 놋요강에 숨겨 가져온 독립군들의 상기된 얼굴을. 이 눈물겨운 거래를 통해 소총 1200정과 탄약 80만 발, 박격포 2문과 기관총 6정이 독립군에 전달되고 이 무기들은 청산리전투에서 불길을 뿜게 돼. 체코 군단은 독립군에게 무기를 건네며 이렇게 인사했을지도 모르지. “합스부르크 놈들 잡을 총탄이었소. 이제 당신들이 일본군에게 쓰시오.”
한편, 체코 옆에 있는 나라 헝가리도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 많은 헝가리인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지. 1920년대 초, 중국 베이징에 기이한 헝가리 사람 하나가 나타났어. 이름은 ‘마자르’라고 하는 이 헝가리인은 거리와 술집을 헤매며 조선 사람을 찾았고 조선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발음도 안 되는 조선 이름을 읊었어. “김원봉을 아시오?” 바로 의열단장 김원봉을 찾는 거였지.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서양 밀정까지 쓰나 의아해했을 조선인들도 ‘베이징에서 김 서방 찾는’ 서양인의 사연을 궁금해하게 돼. 이 사실을 전해들은 김원봉은 짚이는 것이 있었지. “혹시 그 사람이 말하던 서양인인가.”
깊은 울림을 주는 약소국 혁명가들의 연대
헝가리의 혁명운동가였던 마자르는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 몽골에서 이태준이라는 한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게 돼. 이태준은 몽골 국민들 태반이 걸렸던 무서운 전염병인 매독을 퇴치한 공으로 몽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명의(名醫)이자 김원봉과 의기투합했던 독립운동가였어. 그는 마자르가 폭탄 제작에 솜씨가 있는 걸 알고, 투쟁에 쓸 폭탄의 성능 때문에 애를 태우던 김원봉에게 마자르를 데려오마 약속해. 그러나 이태준은 일본인의 농간으로 러시아 백군(반혁명군) 지도자에게 체포돼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어.
마자르는 이태준으로부터 조선인 독립운동가 김원봉과 그를 도와 할 일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어. 이태준이 죽은 뒤 무작정 베이징으로 온 거지. “단 한 번 약산(김원봉)의 이야기를 들었을 따름으로 그렇듯 허위단심 북경까지 찾아 이른 것은 결코 그 보수가 탐났기 때문이 아니다. 실로 자기의 기술을 가져 조선 혁명운동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에 크나큰 기쁨과 자랑을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다(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대체 그는 왜 그런 모험을 강행했을까. 강대국 지배를 받던 약소국 혁명가끼리 갖는 연대감도 있었겠지만 그에 더해 아빠는 의사로서 충분히 호의호식할 수 있었지만 독립운동에 용감히 뛰어들었던 청년 이태준으로부터 마자르라는 헝가리인이 깊은 울림을 얻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해서 마자르는 고성능 폭탄을 만들어 의열단에게 전달하게 된단다. 영화 〈밀정〉의 주요 내용은 바로 마자르의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려던 의열단의 대담한 작전을 뼈대로 하고 있지.
폭탄을 만들면서 헝가리 노래를 흥겹게 불렀고, 폭탄을 운반하면서 멀쑥한 신사 차림으로 중국과 일본 관헌들의 눈을 속이는 연기력도 선보였다는 명랑한 헝가리 청년 마자르의 이후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아빠는 마자르 역시 조선의 금비녀와 금가락지 그리고 놋요강을 오래도록 간직했던 체코 군단의 병사들처럼, 지구의 반대쪽 황량한 땅에서 잃어버린 조국을 찾겠노라 눈을 반짝이던 사람들,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던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조선인들의 모습에 공감했고, 그들을 도왔던 추억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으리라 믿는다.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대개 강한 자의 힘이었지. 때로 그에 필적할 만큼 강력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건 약자들의 연대일 거야. 질풍노도 같았던 1920년대, 지구의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손을 맞잡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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