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세상이 ‘크래프트(수제 맥주)’로 달려간다. 몇 년 전만 해도 이태원이나 홍대 앞에서 접할 수 있었던 크래프트 맥줏집이 동네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소맥’파가 주름잡던 삼겹살집에서도 쌉쌀하고 짙은 향을 지닌 페일에일,
IPA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세상이다. 대형마트는 물론, 일부 편의점에서도 크래프트 비어를 만날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건 7월 말 문재인 대통령이 기업인을 초대해 세븐브로이 맥주를 마신 사건이었다. 강원도 횡성에 있는 세븐브로이는 2011년 국내 최초 크래프트 맥주회사로 첫발을 뗀 곳이다. ‘대통령의 맥주’가 된 세븐브로이의 매출은 이후 껑충 뛰었다. 크래프트 맥주가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맞는 분위기다.

ⓒ연합뉴스지난해 7월14일 서울 연세로에서 열린 ‘제2회 신촌 맥주축제’에서 시민들이 맥주를 즐기고 있다.

용어 정리부터 하자. 맥주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에서 등장한 크래프트 맥주는 사실 ‘장인정신을 지닌 소규모 양조 맥주’를 뜻한다. 국내에서 크래프트란 용어는 오비·하이트·롯데 세 맥주 기업의 독과점 구조 반대편에 서 있는 집단 전체를 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제 맥주, 하우스 맥주, 마이크로 브루어리 등을 포괄하는 단어로 크래프트 맥주가 쓰이고 있다. 국내 맥주 산업 구조에서 크래프트 맥주는 ‘골리앗에 맞선 다윗’이 되어 굳세게 살아남았다.

크래프트 맥주 열풍의 발단은 국산 맥주에 대한 실망이었다.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 〈론리플래닛〉에서 한국 맥주를 ‘워터리 (watery·밍밍하다)’라고 비판하는 등 국내 맥주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있어왔다. 


가장 최근에는 2012년 영국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이었던 대니얼 튜더가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라는 칼럼을 써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한국 맥주에 대한 비판 의견이 쏟아지는 등 후폭풍이 컸다. 이후 그는 서울 이태원에 크래프트 맥줏집을 열면서 직접 맥주 시장에 뛰어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해부터 여러 술집에서 ‘대동강 페일에일’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맥주를 대니얼 튜더가 공동 기획했다는 점이다. 남북 교류 중단 이후 수입이 끊긴 북한 ‘대동강 맥주’와는 아무 상관 없다.

2015년 주세법 개정안이 시행된 것도 컸다. 소규모 양조장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크래프트 맥주 사업 진출이 용이해졌다. 이후 각종 창업 사이트에서 크래프트 맥줏집이 유망 업종으로 떠올랐다. 이후 서울은 물론 지방 대도시에도 크래프트 맥줏집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KDB산업은행이 5월 발표한 〈국내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현황과 전망〉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후엔 크래프트 맥주가 전체 맥주 시장에서 10%를 점유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연간 4600억원 규모다. 이미 신세계, 진주햄 등 기업에서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 뛰어들었거나 기존 업체를 인수했다.

이런 와중에 시장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올봄 하이트진로에서 출시한 필라이트가 시장에서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문제는 필라이트가 엄밀히 말해 맥주가 아닌 ‘기타 주류’라는 점이다. 주세법에서는 맥주 원재료 가운데 맥아 함량이 10% 미만일 경우 맥주가 아닌 기타 주류로 분류해 세금이 대폭 낮아진다. 비싼 맥아 함량이 줄면서 생산원가 또한 낮췄다. 세금과 생산원가가 떨어지면서 시장 판매 가격도 떨어졌다. ‘만원에 열두 캔’이라는 저가 전략을 앞세워 맥주 시장을 흔들고 있다.

필라이트가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해도 업계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다. 크래프트 맥주처럼 고급화·다양화한 맥주가 대세로 떠오르는 판국에 맥아 함량을 낮춘 ‘저급 맥주’에 누가 관심을 두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필라이트는 없어서 못 파는 효자 상품이 되었다.

맥주 마니아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국산 물맥주보다 더 형편없는 쓰레기’라는 악평이 있는가 하면 ‘맥아 함량이 높은 기존 국산 맥주보다 낫다’는 호평도 나온다. 물론 돈벌이에 혈안이 된 대기업이 ‘싸구려 맥주’를 내놓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내 맥주 대기업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필라이트 같은 정체불명의 ‘맥주 맛 음료’를 마시는 이들에 대한 비난도 잇따른다.

크래프트 맥주는 옳고, 기존 맥주는 틀렸다?

ⓒ연합뉴스7월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주요 기업인들을 초청해 세븐브로이 맥주를 마셨다.

이것은 일종의 ‘양극화 현상’이다. 국산 맥주에 대한 비판 여론이 10년 이상 지속되면서 ‘맥주 담론’도 한쪽으로 기울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크래프트 맥주가 올바르고, 기존 맥주는 틀렸다는 주장이다. 물론 오랜 독과점 구조에 안주하며 소비자의 욕구를 따라가지 못한 국내 대기업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합당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어디 가서 국산 맥주 마신다고 하면 ‘맥주를 모른다’고 취급하는 분위기가 불편하다”라고 토로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국산 맥주가 새로운 시도를 전혀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2013년 하이트진로가 내놓은 ‘퀸즈에일’은 출시하자마자 호평을 얻었다. 쌉쌀하면서도 풍부한 향이 매력인 에일 맥주 맛을 제대로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제 주류품평회에서도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하이트진로의 뒤를 이어 오비맥주도 ‘에일스톤’을 출시했다.

하지만 이들 맥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퀸즈에일은 현재 생산량을 크게 줄인 상태고, 에일스톤은 지난해 생산을 중단했다. 기존 국산 맥주를 즐겨 먹던 소비자는 에일 맥주에 눈을 돌리지 않았고, 에일 맥주 소비층은 크래프트 맥줏집에서 더 신선한 술을 마시기를 원했다. 이들 맥주는 틈새를 뚫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대세 맥주는 따로 있다. 이른바 ‘라거’ 맥주다. 단순하게 말해서 맥주는 청량감이 강조되는 라거와 풍부한 향이 특징인 에일로 나뉜다. IPA, 페일에일 등 에일 맥주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한국은 물론 일본·독일 같은 맥주 강국에서도 라거 맥주가 대세다. 크래프트 맥주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 역시 라거가 대세다.

맥주 전문가들은 한국 맥주도 이제 ‘투 트랙’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크래프트 맥주로 상징되는 다양한 고급 맥주와 필라이트 같은 ‘제3맥주’가 공존하는 시대다. 여기에 굳이 우열을 가려가며 양극화를 부추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시사IN〉이 마련한 맥주 좌담(56~58쪽 기사 참조)에서 류강하·윤동교 두 사람이 이야기했듯 맥주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생필품’이니까 말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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