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에게 쉬운 일이 그에겐 어려웠다. 원칙을 어기는 일, 아는 사람에게 편의를 봐주는 일, 답례로 건네는 봉투를 거절하지 않는 일, 이 모든 일을 할 때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 그렇게, 그저 ‘남들처럼 사는 일’이 그에겐 참 어렵기만 했다.

과거 때문이다. 독재 정권을 끌어내린 군중 속에 서 있던 과거,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불의에 맞선 과거,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 과거를 배반하고 싶지 않아서다. ‘지난날의 꿈이 나를 밀어’ 여기까지 왔다. 적어도 남들처럼은 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날 아침을 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던 딸아이의 등굣길. 엘리자(마리아 드라구스)를 학교 앞에 내려주고 애인 집에 간 로메오(아드리안 티티에니)가 막 사랑을 나누려는 참이었다. 쉼 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황급히 뛰어나간다. 병원이다. 엘리자가 실려 왔다. 강간미수 및 폭행치상. 크게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지만 하필이면 시험 전날 이런 일을 당했다.

ⓒDaum 갈무리

어려서부터 부모 마음에 쏙 드는 딸이었다. 원체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일찌감치 유학 보낼 마음을 먹었다. 졸업만 하면 장학생으로 받아준다는 영국의 대학이 두 군데나 되었다. 졸업만 하면, 이라는 단서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졸업 시험은 어차피 형식일 뿐이니까. 적당히 준비해서 적당한 성적만 얻으면 되니까. 외국 명문 대학 장학생으로 갈 아이가 낙제를 걱정할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다. 정신적 충격도 만만치 않은데 무사히 시험을 볼 수 있을까? 손목에 깁스까지 했는데 답이나 적을 수 있을까? 아버지는 걱정이 태산이다. 그 태산 같은 걱정에 짓눌려 밤잠을 설친다. 그러다 결국, 남들처럼 사는 길을 찾는다. 딱 한 번, 딸아이를 위해서 딱 한 번, 특권과 반칙에 기대기로 한다.


각자도생 모색하는 수많은 로메오에게

지난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루마니아 영화 〈엘리자의 내일〉을 보는 내내 이 작품이 루마니아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로 역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신의 소녀들〉(2012)로 같은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기도 한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국적은 분명 루마니아인데도, 이상하게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만든 영화 같았다. 우리와 참 비슷했다. 로메오가 사는 오늘 그리고 그가 바라는 ‘엘리자의 내일’이, 지금 한국에 사는 모든 어른의 오늘과 그들이 자식 손에 쥐여주고 싶어 하는 내일을 지독히도 닮았다.

한국의 ‘민주화 세대’가 그러했듯 과거의 로메오는, ‘자신’이 겪은 부조리를 ‘자식’은 겪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한국의 이른바 ‘386 세대’가 또한 그러하듯 지금의 로메오는, ‘남의 자식’이 겪고 있는 부조리를 ‘자기 자식’만은 겪지 않길 바란다. 악착같이 각자도생만을 모색하는 여기와 거기의 수많은 로메오들에게는 때로 ‘평등한 기회’가 걸림돌이다. ‘공정한 과정’은 공정하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불공정해 보인다. ‘정의로운 결과’는 같이 도달할 목표가 아니라 혼자 성취해야
하는 열매다.

정의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 나라면, 내가 로메오라면, 내가 엘리자라면 어떤 오늘을 선택하고 어떤 내일을 감당할 것인가? 영화가 던지고 떠난 질문마다 차근차근 자신만의 답안지를 작성하는 관객이라면, 〈보스턴 글로브〉가 쓴 이 한 줄 평에 동의할 것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이 바뀌는 영화.”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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