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발가락이 부러졌다. 욕실 문에 발가락이 (냅다) 부딪혔을 뿐인데 이 사달이 났다. 인생 한 치 앞을 모른다지만, 미뤄두었던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던 중에 골절 진단을 받고 나니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사무실의 한 동료는 ‘다치는 건 꼭 그렇게 다치더라’며 사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동감과 이해를 전해주었다. 몇몇 친구는 더 구체적으로 자신들도 욕실에서 넘어져 팔꿈치가 깨지고, 갈비뼈가 나갈 뻔한 적이 있다며 그야말로 욕실은 정글이고 전쟁터임을 새삼 알려왔다. 그 와중에 허종윤씨는 휴대전화 메신저로 ‘글 아이템 하나 나왔네’라며 농담 반 진담 반. 글이란 자고로 일상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종윤의 말을 보고 있자니 더 사실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작가에 관한 이야기가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하나의 마감을 위해 오늘 자기 스스로 욕실 문에 발가락을 던지는 작가란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가.

 

ⓒGoogle 갈무리다쳤다. 아플 때는 주변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의 말이 큰 위안이 된다.

상상해도 어처구니없기란 매한가지. 그래도 한창 더울 때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시의적절한 걱정과 ‘발가락 파이팅’이라는 귀여운 응원까지 듣고 나니 불행 다음은 행운이라는 심정으로 로또를 샀다. 아픔만큼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만큼 긍정하게 된다. 때때로 누군가에게 일확천금은 ‘의료비 비급여’ 항목을 처리할 정도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병원비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이 반가웠던 건 새끼발가락 때문은 아니다. 병원 갈 일이 늘어나면서 (언제 어디에 써먹나 알 수 없었던) 실비보험을 효율적으로 써먹은 적이 있어서다. 국가적 차원의 더욱 촘촘한 의료안전망이란 어쩌면 아주 원대한 것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곰곰 돌이켜보면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다는 사연이나 간병 필요한 사람 하나 있으면 집안이 거덜 나더라 하는 사연은 이상하게도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여기 가까이 있는 것이다. 지금 병원비로부터 자유로운 자, 몇이나 될까.

몇 해 전, 직접 나서서 보험 하나 들어본 적 없는 내가 실비보험에 가입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건 보험설계사의 세상 듣기 좋은 소리나 보장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아니라 당장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친구에게서 들었던 ‘실비보험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실비보험이 없어도 실비보험만큼이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천만다행일 것이다. 실비보험을 해지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문의가 여기저기에서 끊이지 않는다는 건 아마도 그토록 많은 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의료를 민간 분야가 아니라 공공 분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뜻 병원을 찾지 못하는 당신

발에 깁스를 하고 사무실에 앉아 있자니 (당연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사무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괜스레 휴대전화 달력에 저장해둔 일정을 살펴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발가락 건강 회복을 위하여 몇몇 일정을 취소해보기 위해서였다. 가끔은 아파야지만 지금까지 써먹어온 몸의 시간을 되돌아보기도 하는 법. 오랜 노동으로 발뒤꿈치 통증 증후군을 앓고 손가락에 염증이 생기고 거북목이 되고 골반이 틀어지고 쇄골과 어깨로 담이 오는데도 선뜻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 그리고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다. 아마도 그 사람이 기원하는 여섯 개의 숫자는 당신이 기원하는 당첨 번호와 같은 것일 테다. 그러고 보면 아플 때 여러 사람에게서 듣게 되는 ‘괜찮아, 어쩌다 이랬어, 나이 먹으면 뼈도 잘 안 붙는다는데, 앞으로 살살 좀 살자’라는 말들은 그 자체로 어떤 보험의 특약 같기도 하고 1등보다 사실적으로 쓸모 있는 5만원짜리 당첨 번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저러나 자나 깨나 문 조심, 발가락 조심이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발가락뼈 요놈이 더 아프고 더 오래 몸을 괴롭힌다고 한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