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이하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역대급’ 변신을 선보였다. 먼저 우파와의 연합을 성공시켰다.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자유당(PL)의 주제 알렌카르를 지명했다. 알렌카르는 중도 우파 정당의 지도자이자,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브라질 최대 의류기업의 사장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게다가 중남미 최대 재력을 자랑하는 개신교 단체의 명망가였다. 룰라는 가톨릭교도이자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자신과, 개신교도이자 기업가의 지지를 받는 알렌카르의 결합이 환상적일 것이라고 여겼다. 선반공 출신 좌파가 사장 출신 우파와 손을 잡는다? 룰라는 자신들의 관계를 가문끼리 철천지원수였던 로미오와 줄리엣에 빗댔다. “우린 서로 깊은 애정을 고백했다. 남은 것은 부모의 허락뿐”이라고 말했다. 양당의 승인을 부모의 허락으로 능청스레 비유한 것이다.

룰라 후보는 급진적 경제정책에서 탈피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라질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국제통화기금을 비롯한 국제 금융기관에서 빌린 외채를 모두 상환할 것을 약속했고, 전임 카르도주 정부의 거시경제 안정책도 고스란히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변신의 와중에도 룰라는 노동자당의 색깔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며 “유토피아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장기적인 전망이다. 다른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생애 처음 먹어보는 강낭콩 한 접시이고, 생애 처음 갖는 일자리이며, 생애 처음 받아보는 진료이고, 생애 처음 가보는 학교이다”라고 말했다. 즉 노동자당은 장기적 전망으로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를 계속 추구하지만, ‘생애 처음 먹어보는 강낭콩 한 접시’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놓는 정당으로 변신하겠다는 주장이었다. 급진적 개혁 대신에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노선을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연히 당 안팎의 전통적인 지지층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우경화’ ‘배신’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에 룰라는 “아무리 훌륭한 정책도 실천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책상 서랍 속에서 한 세기 이상 썩게 된다”라며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 반대로 국제금융계와 브라질 우파는 룰라의 과감한 변신에도 반신반의했다. 그들의 눈에 룰라와 노동자당은 여전히 불온한 좌파였다. 룰라 후보의 상승세를 보여주는 여론조사가 발표될 때마다 자본 유출, 주가 추락, 국가신인도 하락이 발생하고, 브라질 헤알화의 가치가 출렁거렸다. 당시 카르도주 대통령은 “브라질이 아르헨티나가 될지 모른다”라면서 불안감을 자극했다. 여당 후보인 주제 세하를 찍지 않고 룰라에게 투표하면 브라질이 2001년 아르헨티나처럼 국가부도 사태를 맞을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세계 최고의 펀드매니저’ 조지 소로스도 대놓고 “아르헨티나인가, 주제 세하인가”라고 물었다.


사회운동 단체들 정책 결정 과정에 끌어들여

하지만 룰라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상파울루 노동자들이었다. 1975년 선반공 룰라가 금속노조 위원장이 되었을 때부터 2002년까지 늘 한결같이 지지를 보내온 이들이었다. 선반공 룰라가 기업가들을 만나느라 구레나룻도 다듬고, 정장과 넥타이로 말쑥하게 차려 입었지만, 노동자들은 박수로 룰라를 연호했다. 그들 앞에서 룰라가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굳게 다짐했다. “브라질 엘리트들이 결코 이루지 못한 것을 한 선반공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고야 말겠다!” 2002년 10월 말 룰라 후보는 지지율 61.3%로 승리를 거두었다. 2006년 대선에서 연임에도 성공했다.

ⓒAP Photo2003년 1월1일 브라질의 새로운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취임식 후 부인과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룰라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8년간 브라질을 이끌면서 브라질 엘리트들이 일찍이 이루지 못했던 정치 스타일을 몸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였다. 그가 집권 초에 임명한 공직자들의 면면을 보면 얼마나 이질적인 인사들을 모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아마존 환경운동가, 전직 게릴라 같은 좌파는 물론이고 보스턴 은행장, 하버드 법대 교수 등 상류층 명사까지 평생 서로 만날 일이 없을 법한 인물들이 내각과 주요 정부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런 팀을 이끌면서 룰라는 외줄타기의 명수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균형을 잡아갔다. 너무 오른쪽으로 기울면 왼쪽으로 몸을 틀고, 왼쪽으로 너무 나가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모두를 만족시키는 통합의 정치를 펼쳐갔다.  

먼저 룰라 정부는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데도 균형을 잘 잡았다. 노동자당 정부는 대의제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브라질 정치는 무려 30여 개 원내 정당이 난립하는 ‘콩가루 정당제’가 지배했다. 룰라 정부가 연방 상원과 하원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연방 행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선 정당 간의 합종연횡은 필수였다. 매우 이질적인 역사를 가진 우파 정당들과도 연합을 맺어야 했기 때문에 기나긴 타협과 조정이 불가피했다. 이 고충에 대해 룰라는 “예수가 브라질 대통령이라면 가롯 유다와도 손을 잡아야 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타협과 협상의 명수다운 발언이었다. 룰라는 집권 이후 다양한 시민 참여 제도를 도입했다. 경제사회발전위원회를 만들어 그가 직접 주재하기도 했다. 이 기구는 재계, 노동계, 사회운동, 대학교수들이 참여하는 기구로 브라질판 노사정위원회였다. 또한 브라질의 심각한 대도시 문제들, 가령 치안과 주택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연방도시부를 신설하고 도시위원회를 설치했다. 도시위원회는 32만명이 참여하는 지역회의(시회의와 주회의)를 거쳐 선출된 2510명이 연방회의를 열고 다시 거기서 선출된 민간 대표 40명과 연방·지방 공무원 30인으로 구성된 도시위원회가 연방정부의 도시정책을 직접 설계했다. 이 같은 참여제도는 거리 시위를 유일한 집단행동으로 삼았던 사회운동 단체들을 연방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룰라 정부는 성장과 분배의 균형도 잘 잡아갔다. 우선 거시경제를 안정시켰다. 전임 카르도주 정부보다도 물가를 더 낮추고, 재정 흑자는 더 높이는 정책으로 좌파 정부로 인한 시장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정부 역할도 점진적으로 강화해나갔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때에는 불황을 막기 위해 ‘성장촉진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간접자본과 공공주택 사업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했다. 또 정부가 산업정책을 수립하고 전략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공은행의 신용 혜택을 비롯한 다양한 지원책을 펼치기도 했다. 행운도 따랐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국제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원자재 부국 브라질 경제가 순풍에 돛을 달았다. 그 결과 브라질 경제는 2004년에서 2009년까지 4.8%의 건실한 성장을 이어갔고, 실업자 수도 줄어들었다. 수십 년 만의 호황이었다.

2010년 룰라는 집권 초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취임했을 때만 해도 브라질은 자본 없는 자본주의였다. 그래서 당시 우선 자본주의부터 만들고 봐야 사회주의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분배하기 전에 분배할 것을 먼저 만들자고. 가진 게 없는 국가는 나눠줄 것도 없으니까.” 

그는 자본주의가 다 만들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지는 않았다. 당장 ‘강낭콩 한 접시’가 필요한 빈민들을 위해서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최저임금을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빈민층을 줄이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복지정책도 추진했다. 집권 초부터 당시 인구 약 1억8000만명 중 5000만명에 달하는 빈민층을 줄이는 데 착수했는데, 룰라는 복지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 하고, 빈민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 말한다”라고 반박하면서 빈곤 퇴치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족수당(Bolsa Família)’ 정책이었다. 가족수당은 아동의 취학과 예방접종을 조건으로 빈민 가구에 주는 생활보조금을 말한다. 빈곤 가정에 국가교육 서비스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제가 성장하자 정부는 지급액을 꾸준히 늘리고, 수혜 범위도 계속 확대했다. 2011년에는 1200만 이상 가구(약 5000만 인구)가 23~178달러의 가족수당을 받게 되었다. 극빈층을 위한 기초소득 제도와 아동수당 제도도 도입했다. 가족수당 제도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도 효율적인 빈곤 퇴치 정책으로 평가받았다. 그 결과 2003년 집권 원년 당시만 해도 전체 인구의 약 25%에 달하던 빈민 수가 2011년에는 11%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에 브라질 국민 3200만명이 중산층으로 편입되었다. 중산층이 늘고 빈민이 줄어들면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인 브라질에서 불평등이 줄어드는 반전이 일어났다.

룰라 정부는 외교에서도 균형을 잘 잡았다. 미국의 부시 정부와는 반제국주의와 같은 이념적 태도를 버리고 실용 관계를 맺었다. 당선 직후 먼저 미국부터 방문한 룰라는 “미국이 아직도 브라질을 축구와 삼바의 나라로만 알고 있다”라고 꼬집으면서도 부시 정부와 소통이 잘 되는 정부라는 위상을 유지했다.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둘러싼 논쟁을 좌우파의 이념 대결이 아니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실리 논쟁으로 바꾸어놓았다. 룰라 정부는 미국이 자국 농민들에게는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면서도 개발도상국 정부에는 농업보조금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이중성을 비판했다. 오히려 미국이 농업보조금 지급을 철폐하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에 공을 넘겼다. 미국은 브라질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미주자유무역지대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칠레와 우루과이에서도 ‘룰라형 좌파’ 인기

ⓒEPA2008년 5월23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남미국가연합(UNASUR)이 공식 출범했다(가운데가 룰라 대통령).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룰라 정부의 균형감은 두드러졌다. 룰라 정부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와 같은 좀 더 급진적인 좌파 정부들과 콜롬비아·페루·멕시코의 우파 정부들 사이에서 타협의 대가다운 실력을 과시했다. 급진 좌파와 우파 정부 모두가 참여하는 통합기구 건설에 앞장섰다. 2008년 남미국가연합(UNASUR) 창설을 주도하고, 2010년 중남미·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 창립을 주도했다. 룰라는 이념적 잣대보다는 강대국에 맞서 개발도상국과 빈국의 공동 이해를 도모하는 경제적 실리를 내세워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EPA2011년 1월1일 룰라 전 대통령(오른쪽)이 새로 취임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손을 들고 있다.

정치·경제·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룰라 정부가 보여준 균형의 정치는 브라질 다수 국민의 통합에 기여했다. 집권 마지막 해인 2010년에 룰라 정부는 무려 87%에 이르는 지지를 받았다. 이는 브라질 민주주의 사상 최고의 지지율이자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이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깊이 감명을 받은 나머지 룰라를 “세상에서 가장 인기 많은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내 우상”이라고 고백했다. 선거에 출마하려는 브라질 정치인들은 좌우 정파를 막론하고 룰라 대통령과 사진을 찍고자 줄을 섰다. 대선에 출마한 우파 후보도 룰라를 계승하겠다고 공언했다. 세계적인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룰라 정부의 성취에 깊은 감명을 받아 “기울어진 세계의 균형을 잡는 데 기여한 정부”라고 평가했다. 역사의 시계추가 시장만능주의로 완전히 오른쪽으로 치우친 시기에 등장해서 왼쪽으로 시계추를 옮기는 구실을 했다는 지적이다. 룰라 정부의 성공은 2010년과 2014년 브라질 대선에서 연달아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1999년부터 2015년까지 중남미 주요 10개국에 좌파 정부가 집권하고 재집권한 현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등장한 정부들 가운데 온건 노선을 걸은 칠레 사회당의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과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우루과이 광역전선의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과 호세 무히카 대통령 등은 ‘룰라형 좌파’로 불렸다(다음 호에 계속).

기자명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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