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간보다 큰 상상과 기대가 욱여넣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거장들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의 빈 종이가 어떤 빛깔과 질감으로 채워질 수 있었을까 상상하며, 완성된 그림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 앞에 머무르기도 할 것이다.

ⓒ이우일 그림

스물한 살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청춘 스타가 그로부터 2년 후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어린 나이에 얻은 유명세로 고통받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안일한 풀이를 폐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손쉬운 추론을 한 겹 걷어내고 그의 삶 전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스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벌써 2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난 배우 리버 피닉스. 물과 불을 동시에 담은 이름만큼이나 모순된 특징들이 그를 구성하고 있었다.

먼저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장 발작이라는 사인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와 달리 그는 향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환경주의자로 채식을 했으며, 로고가 가죽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를 거절했다. 동물보호단체 ‘PETA’의 지지자이자 많은 환경·인권단체의 기부자였다. 동물들의 터전인 우림 지역이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코스타리카 밀림 800에이커(약 98만 평)를 사들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꾸밈없는 자연을 사랑하는 이가 어떻게 화려하게 꾸며진 스타가 되었을까?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 부모로부터 시작한다.

미국 동부 뉴욕 주 출신이며 비서로 일했던 알린 듀네츠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떠돌이 존 보텀은 길에서 만났다. 알린이 이전 삶을 모두 버리고 떠난 여행에서였다. 해안을 따라 유랑하며 삶을 즐기던 두 사람은 얼마 후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히피 공동체 ‘신의 아이들’에 들어갔고, 첫아이인 리버가 태어났다. 이후 포교를 명목으로 가족은 남미를 유랑했고, 그 와중에 리버는 길거리 공연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곤궁한 삶과 공동체의 비리에 염증을 느낀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가며, 재기를 뜻하는 불사조 ‘피닉스’로 성을 바꾼다.

삶이 단숨에 달라지진 않았다. 당장이라도 팔릴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학교를 다녀본 일도 없는 어린 히피 소년은 쇼 비즈니스의 세계가 버거웠다. 하지만 실질적인 가장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리버는 여러 번 오디션 탈락과 프로그램 중단을 겪은 후 마침내 얻은 배역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주목받으며 영화계로 진출한다. 히피 부모가 가진 자유로움을 사랑하고, 주류 세계를 피하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있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그 안에서 자리를 찾으려 애써왔던 지난 삶은 소년에게 남다른 깊이를 부여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스탠 바이 미〉(1986), 〈모스키토 코스트〉(1986), 〈허공에의 질주〉(1988)를 보면 보통의 양육 환경을 박탈당한 거리의 소년이 스스로의 의미를 찾기 위해 벌인 고군분투가 보인다. 리버가 삶에서 맞닥뜨렸던 내면의 갈등이 묻어난 덕분이다.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해낼 때 진정한 충족을 얻는다”

그를 실제 경험이나 특유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비슷한 연기를 했던 인상파 배우로 단정 짓긴 어렵다. 리버 피닉스는 오히려 섬세한 감성과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배역에 몰입하는 연기파 배우에 가깝다.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해낼 때 진정한 충족을 얻는다”라는 그는, 역할에 관한 세세한 전기를 쓰고 역할과 스스로를 분리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리버는 비슷한 구석이 있는 캐릭터들을 연기했지만 “같은 배역이라도 매번 다르게 연기할 수 있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 수만큼이나 여러 번이라도”라는 말처럼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아쉽게도 막 스케치가 끝난 시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여러 빛깔로 훌륭히 채워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을 리 없다. 어쩌면 그 위에서 리버는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가능성은 때로 아무 곳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까. 대신 상상해본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침통하기보다는, 무한히 자유로운 상상을 허락해준 사람으로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싶다. 그 뜨거운 8월23일을.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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