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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집으로 가는 무서운 길

2017년 09월 06일(수) 제520호
오수경 (자유기고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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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이 끝난 밤 10시.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탄다. 지하철을 타면 10분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지만,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셀 수 없이 성추행을 당한 뒤로 상대적으로 ‘접촉’이 적은 버스를 탄다. 언젠가 어느 자리에서 지하철 성추행을 처음 당한 게 심지어 중학교 1학년 때이며 사람 많은 곳에서 남성들이 가슴이며 엉덩이를 어떻게 만지고 지나가는지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듣던 ‘남자 사람’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냥 사람이 많아서 스친 거 아냐?” 애먼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스치는 것과 만지는 것에 관한 감각을 최대치로 상승시켜 정신 차려 구분하여 판단한다고 설명하려다 그저 웃었다.

버스에서는 어지간하면 맨 앞자리에 앉는다.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젊은 것이 일어나지도 않는다”라며 지팡이로 맞고 “얼굴도 못생긴 게 노약자석에 앉았다”라는 호통을 여러 차례 경험한 이후 뒤쪽 2인석에 앉았다. 어느 날, 창가 쪽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내 허벅지를 만지는 시커먼 감촉을 경험한 뒤로 그 자리도 포기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서 7분 정도 걸린다. 비교적 넓은 골목이라 안전한 편이지만, ‘먹자골목’ 근처여서 술에 취한 이들이 많다. 목소리를 높이며 우정을 과시하는 한 무리의 남성들 앞을 지날 때, 비틀거리는 몸을 휘저으며 내 앞으로 걸어오는 남성들을 마주할 때 나도 모르게 몸을 동그랗게 만들어 ‘없는 인간’처럼 피해 가게 된다. ‘왜 조심은 상대적인 약자의 몫이어야 할까?’ 생각하며 얼마 전 생긴 ‘왁싱숍’ 앞을 지난다.

ⓒ정켈 그림

조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사는 집은 단독주택 2층인데 가로등이나 CCTV 등이 비교적 잘 설치된 골목에 있다. 그럼에도 집 앞에 누가 지나가면 다른 데 가는 것처럼 내 집을 지나쳐 서성이다 사람 그림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대문을 연다. 도어록이 설치된 현관을 열 때 번호를 누르지 않고, 번거롭지만 카드를 대 연다. 최근에는 최첨단·초소형 몰카들이 많아져 혼자 사는 여성 집 도어록 비밀번호까지 찍어 범죄 표적으로 삼는다고 하니 더더욱 누르기 무서워진다. 내 집 앞에 데굴거리는 담뱃갑이나 빈 캔 등도 ‘몰카 용의자’라고 생각하면 이제는 사람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살아야 하나 싶다.

‘귀가 대모험’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방이 뜨끈하고 눅눅하여 창문을 열고 싶어진다. 신선한 공기와 불안을 함께 방 안에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방범창이 제법 튼튼하게 나를 지키고 있지만, 창문을 열면 바스락거리는 소리, 무심히 지나가는 굵은 목소리에도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창문을 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니…’ 생각하며 낡은 에어컨을 켠다.

위험과 공포가 개인화된 세상, 나만 조심하면 문제없을까?


인터넷 뉴스와 SNS를 보며 하루를 정리한다. ‘학교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 어느 교사가 백래시(backlash)를 당하고, 어떤 남성들은 “날씨도 덥고, 잠도 안 와서, 장난으로”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캡사이신을 희석한 소주를 뿌리며 날달걀을 던졌고, 여성 BJ ‘갓건배’를 죽이겠다고 후원금까지 받은 남성이 범칙금 5만원 내고 풀려난 후 다른 여성 타깃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한숨처럼 쏟아진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는 걸 매일 확인하며 사는 초위험 사회 속에서 내 목숨 값은 고작 5만원인가? 

영화 <주온>에서 집 안 ‘이불 속’ 귀신이 튀어나오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상황과 여성인 내가 겪어야 하는 일상의 공포의 거리가 투명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듯 가깝다. 위험과 공포를 완고하게 ‘개인화’하는 세상에서 나만 조심하면 아무 문제없는 걸까? 우리는 왜 이런 뉴스들을 매일 만나며 살아야 할까? 생각하며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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