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의 안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면 일본의 머리 위로 화성 12호 중장거리 탄도미사일(IRBM)을 발사했을 뿐 아니라 9월3일 6차 핵실험까지 감행한 행위는 설명하기 어렵다. 북한은 미국에 대한 ‘괌 포위사격 계획’ 엄포로 상당 부분을 얻었다. 무엇보다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의 축소가 이루어졌다. 미국은, 훈련 축소가 처음부터 계획에 따른 것일 뿐 북한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은 2015년 1월9일 한·미 훈련을 중단하면 핵·미사일 실험 중단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논의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은 늘 한·미 군사훈련에 관한 한 북한의 제안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미국이 올해 UFG에서는 미군 쪽 참가 인원 7500명을 축소했다. 북한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전략 자산 동원도 이뤄지지 않았다. 훈련 규모의 축소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8월14일 김락겸 전략군사령관의 괌 포위사격 계획안에 “당분간 미국의 행태를 지켜보겠다”라며 유보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때 한·미 외교가에 ‘북한이 9·9절만 조용히 넘어가면 미국은 곧바로 대화를 시작할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노무현-김정일 10·4 선언 10주년과 10월10일 북한 당 창건기념일까지 상황 관리를 잘하면 비핵화 대화 공간이 열릴 것이라고 낙관적 전망을 하기도 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8월30일 조선중앙방송은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화성 12호 발사 훈련을 참관했다고 보도했다.

예상을 깨고 북한은 다시 도발을 감행했다. 8월26일 강원도 깃대령에서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을 발사했다. 8월29일에는 일본의 머리 위로 중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초대형 도발을 이어갔다. 그리고 6차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그 사이에 미국이 북한을 자극하거나 도발한 사실은 없었다. 잇단 도발은 “당분간 미국의 행태를 지켜보겠다”라고 한 김정은 위원장 본인 발언과도 모순된다. 물론 이번 도발을 UFG 강행에 대한 반발로 볼 수도 있다. 북한이 처음부터 UFG 중단까지 바랐다면 무리한 기대였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이 미국의 안전보장이라는 ‘안보-안보 교환’의 틀에 국한하면, 국정원 설명대로 북한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개발 완료 때까지 시험발사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의 이런 설명에는 맹점이 있다. ICBM과 SLBM 완성이 마치 신성불가침의 목표인 양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떠한 협상 노력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북한은 왜 사실상 UFG 축소가 이뤄졌고 미국이 유화 제스처를 보였음에도 도발을 이어갔을까. 그 대상이 하필이면 한국(8·26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일본(8·29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이었을까?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만을 원했다면 한·일을 향한 추가 도발을 접고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는 타이밍이었다. 미국은 이미 북한에 ‘체제 전복, 정권 붕괴, 조속한 남북통일, 미군의 38선 월경’ 등을 하지 않겠다는 ‘4NO’에 대해 계속 언급해왔다. 사실상의 불가침 약속일 뿐 아니라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해도 그 이상 나올 게 별로 없을 정도의 얘기를 해온 것이다.

핵 동결 자금의 실질적 물주를 건드리는 전략?

북한이 얻고자 하는 게 안보뿐 아니라 경제적 보상 또는 지원이라는 ‘안보-경제’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안보-경제’ 시각에서 보면 북한은 지금까지 손에 쥔 게 전혀 없다. 지금 미국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오히려 매우 섣부른 행동이 된다. 미국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북한의 안전보장이지 경제 지원 내지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발언에서도 ‘미국은 지난 25년간 북한에 잘못된 보상을 해왔다’라며 비판을 했다. 앞으로 미국이 추가 보상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다짐과 같은 말이기도 했다. 즉 북한 처지에서 미국과 만나봐야 ‘밥이 나오는 것도 빵이 나오는 것도 아닌’ 빈손 대화 국면이다.

ⓒAFP PHOTO8월30일 일본 이시카와 현에서 실시한 미사일 대피 훈련에서 초등학생들이 책상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이 없을 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전에는 미국의 안보 약속이 절실했지만 지금은 그 절실함의 강도가 약해졌다. 북한 처지에서 북·미 대화 내지 협상은 경제적 보상, 즉 돈이 수반되는 협상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직까지 돈이 수반되는 협상을 위한 여건 조성이 안 되었다. 지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복기해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당시 협상 주체는 북한과 미국이었지만 정작 돈을 낸 쪽은 한국과 일본이었다. 당시 비용의 대부분을 낸 한국은 제네바 협상 내용에 불만이 많았다. 북한의 과거 핵, 즉 이미 가지고 있는 핵탄두는 불문에 부치고 현재의 핵인 핵물질과 미래의 핵인 핵 시설만 동결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도 신포에 지어지는 경수로 비용 대부분을 한국이 부담했다. 제네바 합의 몇 달 전에 있었던 ‘전쟁위기설’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6월 미국이 영변의 핵 시설을 폭격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 말렸다고 하지만 그 덕분에 경수로 건설 비용을 뒤집어쓰는 대가를 치른 셈이다.

북한은 이미 지난 5월9일 오슬로 협상에서 미국 측에 핵 동결과 관련한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그동안 생산해낸 폐연료봉 매각 대가로 50억 달러 정도의 보상을 요구했다고 한다(〈시사IN〉 제513호 ‘북한이 쏘아올린 핵 동결이라는 미사일’ 기사 참조). 미국에 요구하는 형식이었지만 북한은 미국이 전적으로 보상금을 내리라 보고 제안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예에 따라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팔을 비틀어 보상금을 받아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심지어 중국·러시아조차 움직이면 돈이라고 생각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차기 주한 미국 대사로 내정된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가 ‘북한의 핵 동결 자금은 북한과의 무역을 통해 많은 이득을 보아온 중국이 부담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을까. 그렇다면 북한은 핵 동결 자금의 실질적 물주라 할 수 있는 한국과 일본을 흔들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8월26일 깃대령에서 발사해 250㎞를 날아간 것으로 알려진 단거리 미사일이 한국에 대한 ‘청구서’라면, 8월29일 ‘경술국치 107주기에 간악한 일본 섬나라 족속들을 기절초풍하게 한(8월30일자 조선중앙통신)’ 화성 12호 중장거리 미사일은 일본에 대한 ‘청구서’인 셈이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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