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한 중견 배우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영화계 캐스팅 관행을 아쉬워했다. 이른바 ‘자기 나이에 맞는 배역’을 오해한다는 것이다. 스무 살 청춘을 꼭 스무 살 배우가 연기해야 할까? 20대 후반 배우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더 깊은 연기를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므로 30대 남자의 사랑 이야기라면 오히려 40대 배우가 적역일 거라고 그는 말했다. 아직 겪지 못한 시간을 ‘상상’하며 연기하는 사람보다 이미 겪은 시간을 ‘기억’하며 연기하는 사람의 표현이 더 풍부할 수 있다는 주장. 일리 있게 들렸다.

이게 꼭 배우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하며 오래전 인터뷰를 새삼 떠올린 건 영화 〈몬스터 콜〉을 보고 나온 오후였다. 포스터와 예고편만 보고 당연히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영화’일 거라 짐작했는데, 정작 어른인 내가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나오는 길이었다. 이토록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아이들이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의 어린 시절을 지나온 어른이라야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드는 이야기 아닐까?

어른들을 위로하는 판타지 영화

한때 열두 살이었지만 이제 다시는 열두 살이 될 수 없는 어른,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지만 그 소중한 사람이 남긴 소중한 기억만은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어른, 그런 어른들을 토닥이고 다독이는 영화 〈몬스터 콜〉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점점 병이 깊어가는 엄마(펠리시티 존스)랑 단둘이 사는 열두 살 소년 코너(루이스 맥두걸).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혼자 방에 틀어박힌 코너에게 커다란 나무 괴물 몬스터(리엄 니슨)가 찾아와 말한다. “앞으로 너를 찾아와 모두 세 편의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네 번째 이야기는 네가 들려줘야 해.” 그날 이후 어김없이 시계가 밤 12시7분을 가리키면, 몬스터가 코너를 찾아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때론 무섭고 때론 슬프고 때론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이야기를.

몬스터가 세 번째 이야기를 다 들려줄 때까지도 내게 이 영화는 그저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영화’였다. 내내 어둡고 오싹한 분위기라서 아이들의 사랑을 받기엔 좀 역부족 아닌가,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네 번째 이야기, 비로소 코너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알았다. 아, 이게 실은 어른들을 위로하는 판타지 영화로구나. 지난날의 상처, 분노, 두려움, 죄의식 따위에 붙들려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가 바로 코너인 거구나.

“투명인간은 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 뒤 더 외로워질까?” 몬스터가 코너에게 던진 이 알쏭달쏭한 질문 하나에 답하려다 보면 결국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거창한 질문에 답하게 된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몬스터가 코너에게 해준 이 충고 하나만 붙들고 매달려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긴요한 질문의 답을 얻는다. “항상 좋은 사람은 없어. 항상 나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지.” 몬스터가 이렇게 말해준 덕분에, 늘 ‘그 사이 어딘가에’서 비틀대며 걷는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국내에 〈몬스터 콜스〉(웅진주니어)로 출간되어 있다는 원작 그림책도 무척 보고 싶어졌다. 원작의 라스트신도 영화의 그것처럼 내 마음을 세게 흔들어놓을지 궁금해졌다. 아직 겪지 못한 시간을 ‘상상’하며 본 아이보다 이미 겪은 시간을 ‘기억’하며 본 어른의 감상이 더 깊고 넓고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답고 사려 깊은 이야기를 종이책으로 한번 더 보고 싶어졌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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