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총각은 언제 어느 곳에 있어도 배우의 향기가 난다고 해야쓰까? 그 남자가 권하믄 청산가리도 새콤달콤할 거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배우 양승걸씨(54)가 쓰고 감독하고 연기한 연극 〈집 나간 아빠〉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자신에게 엉터리 건강보조식품을 판 ‘상철’을 오히려 칭송한다. “무대에서 일생을 불사를” 각오였던 상철은 딸의 양육비 때문에 식품 사기단의 “싸구려 구라꾼”으로 영락한 연극배우다. 속인 상철은 괴롭지만, 속은 노인은 그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낀다. 연극 내내 경제나 사회윤리 같은 현실 원리와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원리가 격렬하게 충돌한다. 배우 양승걸 내면의 충돌이기도 할 것이다.

ⓒ김흥구

양승걸씨는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상투적 표현이지만, ‘운명’이었다. 철없는 초등학생 때부터 국어책의 희곡을 “달달달 외우고 다니”면 그냥 신났다. 1997년 극단에 들어갔는데 책장에 꽂힌 페트 한트케나 페르난도 아라발 같은 난해한 작가들의 작품이 줄거리와 관계없이 죽죽 읽히는 것이 스스로 신기했다. 당시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 연극가의 전성기였다. 하루 2회 공연되는 무대 객석이 꽉꽉 찼다. 개그맨 고 김형곤씨가 만든 연극 〈등신과 머저리〉에서 1인 14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김형곤씨한테 “연극 말고 코미디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그는 “돈까지 받으면서 하고 싶은 연극을 하는데 왜 그만두겠습니까”라고 딱 잘랐다.

2001년부터 배우 섭외가 뚝 끊겼다. IMF 사태가 뒤늦게 연극계에 밀어닥친 것이다. 노는 대신 장편 희곡을 썼다. 2002년 작품인 모노드라마 〈새드 셀카(슬픈 셀프 카메라)〉는 ‘연극 속의 연극’이며 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다. 설암에 걸린 배우가 연인에게 남길 마지막 선물로 그동안 자신이 출연한 연극들을 캠코더 앞에서 하나씩 재연한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웠던 ‘크라우드 펀딩(먼저 티켓을 판매한 돈으로 공연장 대여 등 제작비를 충당)’ 방식의 제작도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배우라는 운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이다.

〈집 나간 아빠〉는 배우 생활 20년 역정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배우라는 존재와 차가운 세상이 상철이란 인물 안에서 투쟁한다. 김수림·정아미·최인숙·정란희·조유정씨 등 실력파 연기자들과 김리원양(아역)이 참여했다. 서울 대학로 해오름예술극장에서 9월1일부터 10월1일까지 상연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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