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 1심 판결이 사실상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부장판사 권혁중)는 기아차에 체불한 임금 4223억원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라고 했다. 기아차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뺀 채 법정수당을 계산해 지급한 것은 잘못이니 그 차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이다.

ⓒ연합뉴스8월3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일부 승소로 통상임금을 인정받게 되자 노조 측 관계자들과 변호사들이 자축하고 있다.

통상임금이란 연장·야간·휴일근로를 했을 때 받는 수당의 기준이 되는 임금이다. 기업들은 고정적인 기본급 대신 정기상여금과 각종 명목의 수당 비중을 높여 임금 인상 효과를 냈다. 그러면서 비중이 큰 정기상여금을 제외한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법정수당을 계산해 지급했다. 저비용으로 장시간 노동이 굴러갈 수 있는 발판이었다. 기아차 노동자들은 이 잘못된 계산법을 고쳐 그간 받지 못한 수당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냈고, 1심에서 일부 승소를 거두었다. 

이번 승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보수 언론과 경제지는 ‘쓰나미’ ‘쇼크’ ‘대혼란’ 같은 단어를 써가며 기업 부담을 강조했다. 소송의 취지도 좀처럼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1심 선고 결과를 전한 포털사이트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은 ‘문 닫고 미국으로 이전해라’다. ‘기아 사업장 축소해라. 생산라인 근로자들도 대거 해고하고.’ ‘그러다 조선업 꼴 난다.’ ‘이기적인 노조 문화 즉시 사라져야 합니다’ 따위 댓글이 심심찮게 보였다. 노동계나 노동문제 연구자 사이에서도 착잡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일부 노동자’의 승리일 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통상임금 문제는 각종 수당이나 상여금 비중이 낮은 중소기업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임금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져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가 불거졌는데, 통상임금 소송으로 더욱 높은 임금을 받게 된 대기업 노동자들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장시간 노동을 유지해온 기형적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거액을 되찾는 주체가, 하필이면 고용이 안정돼 있고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으며 노조의 힘이 강한 이른바 ‘1차 노동시장’의 노동자들이다. 그렇지 못한 대다수 ‘2차 노동시장’의 노동자들에게 통상임금 소송 승소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게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이 제안한 ‘일자리연대기금’이다.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1심 선고를 앞둔 6월20일 기아차지부가 속한 금속노조는, 대법원 판례대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할 때 사측이 내야 하는 미지급 수당 중 일부(5000억원)를 노사가 초기 기금으로 조성하고, 매년 성과금 일부를 노사 각각 100억원씩 적립하는 일자리연대기금을 제안했다. 금속노조 조합원 17만명 중 9만3000여 명이 현대기아차그룹에 속해 있다. 이 그룹사 소속 사업장 17곳 중 13곳에서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 중이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1인당 청구한 임금 채권이 2100만~6600만원에 이른다.

금속노조는 어차피 컨트롤타워는 ‘양재동(서울 현대기아차그룹 본사)’이므로, 대법원까지 소송을 이어가는 대신 노사 간 산별 협상으로 통상임금 문제를 매듭짓자고 주장한다. 일자리연대기금을 조성해 사회에도 기여하고 나아가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체계 개편까지 논의하자는 제안이다.

송보석 금속노조 대변인은 “금속노조 내부적으로 이런 시도 자체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임금이나 고용 보장 요구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사회적 호응이 높아지면 조합원들도 동의할 거라는 판단에서 리스크를 예상하면서도 결정했다. 합동간부수련회, 대표자회의 과정을 거쳐 현대기아차그룹 소속 지부·지회 대표들이 5월 말쯤 최종 뜻을 모았다.”

대통령은 “감사드린다”, 보수 언론은 “속임수”

대통령이 화답했다. 이튿날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면서 금속노조 등이 연대기금을 제안한 데 대해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반면 보수 언론과 회사는 냉소적이다. “있지도 않은 돈을 내겠다니 속임수에 가까운 쇼다(〈조선일보〉 6월21일자 사설).” 현대기아차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일자리연대기금은 앞으로 남은 소송을 모두 노조가 이긴다는 가정하에 체불임금을 미리 달라는 것인데, 실체 없는 이야기다”라고 일축했다. 

ⓒ연합뉴스6월21일 문재인 대통령이 문유진 청년네트워크 대표에게 일자리위원회 위촉장을 수여하고 있다.

현장 조합원 가운데 일부는 조합원들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데 대해 비판적이다. 현대차지부의 한 현장 조직은 일자리연대기금 제안 8일 만인 6월28일 조합원 동의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것은 문제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1심 선고를 앞둔 지난 3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기업별 교섭 요구안을 논의했는데, 통상임금 소송 승소액이 아니라 연말 성과금에서 조합원당 10만원을 내는 방안을 선택했다. 박상모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은 “조합원별로 소송 금액 차이가 크기도 하고, 현대차지부는 (1·2심에서) 패소했는데 기아차지부는 (1심에서) 승소해 기아차만 다 부담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들이 있어서 연말 성과금에서 내는 방안을 택했다”라고 말했다. 김성락 금속노조 기아차지부장은 소송에 따른 체불임금 일부를 일자리연대기금으로 내는 문제와 관련해 “현장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다. 그래도 긍정적 의견이 50% 정도는 된다고 보고 있다. 회사가 산별 교섭 테이블에 나온다면 현장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의 ‘연대’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 지난 4월 금속노조 기아차지부가 ‘1사 1노조’ 통합 9년 만에 사내하청 조합원들을 분리시킨 일도 그런 불신을 키웠다. 금속노조가 총회 개최를 반대했지만 지부는 강행했다.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장은 “통상임금을 제대로 계산하라는 소송은 정당한 요구다. 다만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함께하는 방법은 연대기금 외에도 있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에 적극 연대하고 회사의 불법 파견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석호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은 “이번 금속노조의 연대기금 제안은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다”라고 평가한다. “이미 양대 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성과연봉제 도입에 따른 인센티브 1600억원을 비정규직 처우 개선, 청년고용 확대를 위해 내놓겠다고 제안해 재단 설립이 논의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2007년에 이어 올해에도 정규직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에 쓰겠다고 했다. 여기에 이번 금속노조 제안까지 더해졌다. 경영계가 그토록 말해왔던 노동조합의 변화, 사회적 책임, 신뢰 문제가 분명 풀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경영계가 화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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