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들을 법률 지원하면서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할 때가 있다. 그때 피해자들한테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뭐가 합리적 의심이라는 거냐”이다.

무죄 추정이라는 형사법의 대원칙 아래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이 있으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법리가 불합리하게 적용되면, 뻔한 거짓말을 하는 가해자가 처벌을 피해 간다. 수사와 재판 과정을 지켜본 피해자에게 합리적 의심 대신 불합리한 외면만 남는다.

사회변화에 맞추어 성폭력 사건들이 법정에서 많이 다뤄진다. 이런 성폭력 사건들에서 적용되고 있는 합리적 의심이 다른 사건들과 비교할 때 정말 합리적으로 형평성 있게 적용될까?

‘마지막 보루’인 법이 설득력을 갖지 못할 때

최근 배우 곽현화씨의 동의 없이 가슴 노출 장면을 IPTV에 ‘무삭제판’으로 배포한 이수성 감독에 대해 무죄판결이 났다. 법원은 배우와 감독 사이에 극장 상영분에서 노출 장면을 빼기로 합의한 것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출연 계약서에 제작과 배포 등에 관한 권한을 감독이 가진 것으로 되어 있고, 극장이 아닌 다른 매체에 배포하지 않기로 했다는 합의는 완벽하게 입증되지 않아 합리적 의심이 든다고 판단했다. 법리적으로만 생각하면 납득이 되지 않을 것도 없다. 문제는 인정되는 사실과 그에 따라 응당 지켜졌어야 할 책임의 범위가 상식과도, 또 영화계 현실과도 괴리가 컸다는 점이다. 이런 괴리의 상당 부분은 법이 계약자유에는 익숙하지만 ‘성폭력’과 ‘을의 처지’에 대한 감수성은 떨어지는 데서 발생한다.

 

ⓒ정켈 그림

배우 곽현화의 고소는, 완성된 영화의 배포 권한에 대한 계약 위반을 다툰 게 아니다. 애초에 상영하지 말아야 할 장면을 배포한 행위가 성폭력이냐는 것이었다. 즉, 조금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영화를 완성하는 단계에서부터 곽현화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 출연 계약서에 ‘노출 촬영은 협의하에 진행한다’고 되어 있었다. 촬영장에서 문제의 노출 장면을 찍으며 배우와 감독의 의견이 대립했다. 감독은 ‘선촬영 후편집’을 제안했고 배우가 이를 받아들여 일단 촬영을 했다. 배우는 편집본을 본 후 해당 장면을 삭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초 출연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협의하’에 진행한 촬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곽현화씨는 노출 장면이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극장에서 내 가슴을 보는 것은 안 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보는 것은 된다고 생각해 ‘극장판에서만’ 그 장면을 빼달라고 요구하는 게 일반적일까? 그런데도 법원은 출연 계약서에 근거해 감독이 그 장면을 배포했을 합리적 의심이 있다고 본 것이다. 

법(법원)을 ‘마지막 보루’라고 한다. 갑을관계가 명징한 먹고사는 현장에서 법이 최소한의 내 인격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법만이라도 출연 계약서가 동등한 입장에서 공평하게 작성되었는지, 계약서가 적용되는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출연자의 처지에서 배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아주기를 바란다.

성폭력 사건이 갖는 특성상 당사자들의 주장 외의 직접 증거라는 게 별로 없다. 성폭력 사건에서 그런 간접 증거들이 오간 사정과 당사자 주장의 신빙성을 피고인 처지에서만 따지면 불합리하고 위험하다. 사건이 갖는 특성상 피고인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사정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법원이 합리적 의심이 있어서 유죄를 선고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 사건은 끝나는 게 아니다. 어떤 사건으로 기억되고 어떤 교훈을 남기는가는 이제 세상 사람들 몫이다. 

 

기자명 이은의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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