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퇴냐 잔류냐? 지난 6월1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으로 기정사실화한 미국의 파리기후변화협약(이하 파리협약) 탈퇴가 다소 유동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파리협약에서 무조건 탈퇴하고 보자는 종전의 태도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15년 12월 파리에서 결실을 맺은 파리협약은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시기에 대비해 2℃ 수준 이하로 유지하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전 세계 195개국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줄이기로 합의했다. 지난 6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대혼란에 빠졌다.

ⓒEPA4월29일 백악관 앞에서 열린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반대 시위에서 시민들이 트럼프 대통령 모형의 인형을 들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미국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 건 9월16일 전 세계 30개국 이상의 환경 담당 관리들이 모인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당시 참석자들을 여러 명 인용하면서 “미국 측 인사들이 온실가스 감축량 개정 문제를 꺼내며 미국의 잔류 가능성을 내비쳤다”라고 보도했다. 특히 미겔 아리아스 카네테 유럽연합(EU) 기후행동에너지 집행위원은 이 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미국 측은 파리협약 재협상은 하지 않겠지만 협약에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을 검토하겠다고 했다”라며 미국의 태도 변화를 기정사실화했다. 몬트리올 회의 하루 뒤 미국 측의 허버트 맥마스터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ABC 방송의 시사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만일 미국 국민에게 유익한 합의가 나온다면 당연히 잔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날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도 CBS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 “기존의 파리협약은 미국에겐 터무니없이 균형에 맞지 않는다. 올바른 조건이라면 미국이 탈퇴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역시 파리협약 참가국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콘은 트럼프 대통령의 맏딸 이방카 내외와 함께 미국의 파리협약 잔류를 강력히 지지하는 ‘백악관 3총사’로 꼽힌다.

이처럼 미국의 입장 변화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자 백악관 대변인과 부대변인이 동시에 진화에 나섰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파리협약 관련 미국의 탈퇴 입장에 변화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9월18일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 역시 파리협약 관련 비공개 모임을 마친 뒤 “미국에 좀 더 알맞은 조건이 마련되지 않는 한 파리협약에서 철수한다”라고 천명했다. 그는 ‘알맞은 조건’이 뭔지 밝히기를 거부했다.

백악관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현 단계에서 미국의 탈퇴 원칙은 변함없다. 하지만 미국에 유리하게 조건이 바뀌면 잔류하겠다는 뜻을 동시에 내비친 셈이다. 다만 ‘무조건 탈퇴’보다는 ‘잔류를 위한 조건 마련’ 쪽에 무게를 실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파리협약에 잔류할 조건이란 게 무엇일까? 파리협약에 따르면, 미국은 202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5년 대비 26~28% 줄여야 한다. 결국 미국의 잔류 조건은 ‘온실가스 배출량 목표’를 내려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9월16일 몬트리올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은 “현재 미국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량을 재검토 중이다”라고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행정부가 파리협약의 잔류 조건으로 ‘중국·인도와 미국 간의 형평성을 높이라’고 제기할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은 앞으로 2030년까지 13년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지만 미국은 그럴 수 없다. 인도도 2020년까지 석탄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다. 파리협약은 미국에 매우 불공정하다”라고 불평한 바 있다.

ⓒXinhua2015년 12월12일 유엔 기후변화협약에서 최종 합의문을 채택한 후 반기문 사무총장 등이 축하하고 있다.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 3분의 1 차지

실제로 그럴까?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1위는 중국이다. 그다음이 미국과 인도이다. 하지만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으로 보면, 미국은 중국과 인도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예컨대 중국과 인도의 인구는 각각 13억7000만명, 13억2000만명이지만 미국 인구는 3억2000만명이다. 전 세계 인구의 4%가 살고 있는 미국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3분의 1을 점유한다. 1인당 배출량으로 보면 중국과 인도를 합쳐도 미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

지구온난화 주범으로 꼽히던 중국과 인도는 파리협약을 계기로 친환경 대국으로 변모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늘릴 수밖에 없지만 그해부터는 점차 줄이겠다고 밝혔다. 화력발전을 총전력 생산의 20% 이하로 유지하겠다는 목표까지 제시했다. 인도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33~35%까지 줄여 2005년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겠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2020년까지 총전력의 40%를 재생에너지로 생산하기로 했다. 이산화탄소 배출의 주범인 석탄 산업 육성을 공약한 트럼프의 미국과 달리 중국과 인도는 적어도 석탄 산업에서 벗어나 재생에너지 비중을 대폭 늘리는 쪽으로 에너지 정책의 틀을 바꾸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늘리고 미국의 감축 목표는 줄이는 조치’를 트럼프가 파리협약 잔류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협약 당사국들이 수용할까? 파리협약 성사에 크게 공헌한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 전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은 〈파이낸셜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과연 어느 나라가 덫에 걸린 미국을 풀어줄 용의가 있을지 상상조차 어렵다”라며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파리협약의 성공이 미국의 참가 여부와 직결돼 있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미국 측 감축 목표량을 재조정하기 위한 물밑 논의가 재개될 가능성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파리협약에 따라 각국이 제시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량은 강제 규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국이 파리협약에서 굳이 탈퇴하지 않더라도 트럼프 행정부의 재량에 따라 감축 목표량을 완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경우엔 다른 나라들까지 감축 목표를 지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어렵게 합의한 파리협약의 구속력이 약해져버린다.

결국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미국은 파리협약 탈퇴라는 외길을 가게 된다. 그런데 탈퇴까지 가는 길에는 미국 국내 정치 일정이라는 변수가 있다. 파리협약에 따르면, 서명국이 탈퇴하려면 협약 발효 후 3년을 기다려야 한다. 파리협약 발효일은 2016년 11월4일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11월5일에야 비로소 유엔에 미국의 탈퇴를 서한으로 공식 요청할 수 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20년 11월5일에 미국의 탈퇴가 현실화된다. 그 이틀 뒤인 2020년 11월7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그때까지도 트럼프가 지금처럼 30%의 지지율에 머물러 있다면 설령 재선에 도전해도 낙선은 물어보나 마나다. 다음 대선에서 파리협약의 잔류를 적극 지지하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미국의 탈퇴 논란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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