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걸출하고 훌륭한 사람들만이 평가받는 무대라고 착각하기 쉽지. 하지만 역사는 결코 승자로 구성된 우주가 아니란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명대사처럼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고,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라고나 할까. 별빛은 그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고 누군가 기억되지 않는 빛을 반사하면서 더욱 밝고 커지는 거지. 앞으로 몇 주간은 우리 역사 속에서 도드라지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자 목숨을 걸었던 ‘음지 속의 영웅들’ 몇 명을 소개할까 해.

갑신정변(1884)을 기억하겠지?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고자 일으킨 정변. 배경이 된 곳은 우정총국(郵征總局)의 낙성연, 즉 근대적 우편 정책을 시행할 건물의 완공 축하 파티장이었어. 이 우정총국 설립의 주역은 개화파 홍영식이었어. 보빙사(報聘使)로서 태평양을 건너가 미국을 방문한 그는 근대적 우편 제도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고, 귀국 후 조선에도 이를 도입하자고 강력히 주장했지. 결국 고종의 동의를 얻어 우정총국을 설치하게 돼.

ⓒ시사IN 이명익9월11일 시민단체가 서울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집배원 장시간 노동 방지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우정총국 준공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이 시작되고 그가 주도한 개화파 세상이 단 사흘 만에 끝나버리면서 근대적 우편 정책의 시행은 10여 년이나 늦춰지고 말았어. 머지않아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대한제국의 우편 체제는 일본에 접수됐지.

근대적 우편 제도든 과거의 파발 제도든 공통점이 있다면 결국 사람의 손으로 사람에게 우편물이 전해진다는 거였지. 집배원(우편배달부·우전원 등으로도 불렸지만 여기서는 집배원으로 통일한다) 업무는 예나 지금이나 격무였어. 1940년 3월12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네. “천여 호가 사는 강화읍에 집배인은 단 한 명.” 강화읍 집배원은 하루에 무려 우편물 450여 통을 소화했다니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1923년 7월22일 장맛비가 무섭게 내리던 날이었지. 장맛비라고 우편물이 그칠 리 없는 노릇, 이시중이라는 이름의 집배원은 우편물 가방을 챙겨 길을 나섰어. 그의 담당 구역은 오늘날의 전주시 평화동 2가인 우림·나전면 일대. 장맛비에 불어난 개울이 그의 발길을 가로막았어. 개울만 건너면 엽서를 배달할 수 있겠는데…. 눈대중을 해봤지만 물살은 너무 거셌지. 궁리 끝에 이시중 집배원은 개울 건너편 사람들에게 소리를 쳐. “여기요. 엽서 좀 받아서 마을의 아무개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돌에다 우편물을 비끄러매서 던질 테니까.” 이시중 집배원이 힘껏 돌에 매인 엽서를 던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지켜보던 사람들이 ‘어어~’ 아쉬운 탄성을 질렀어. 돌멩이에 묶은 줄이 풀려서 우편물들이 그만 개울에 빠져버린 거야. 떠내려가는 우편물들을 눈으로 쫓으며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은 뜻밖의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첨벙! 그건 이시중 집배원이 개울에 뛰어드는 소리였어. 마침내 우편물 묶음을 움켜쥐었지만 그는 개울에서 나오지 못했다. 하류의 바위에 걸린 채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손에는 악착같이 우편물이 쥐여 있었지. 우리 우편 역사상 최초의 순직 집배원이었어. 당시 전주우체국장인 일본인 오쿠다 가메마쓰는 그의 시신이 발견된 바위에 글을 새겨 위령비를 세웠다고 해.

1980년 겨울, 충남 안면우체국 소속의 집배원 오기수씨는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안면도의 해안 벼랑길을 더듬고 있었어. 안면도(安眠島)는 ‘편안하게 잠자는 섬’이라는 뜻이지만 그건 일종의 소망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안면도 앞바다는 물살이 세고 풍랑이 거칠기로 유명했고 영호남에서 세곡(稅穀)을 싣고 올라오던 배들이 수없이 가라앉은 곳이었거든. 그날 안면도의 날씨도 보통 심술이 아니었어.

영하 15℃의 혹한을 뚫고 오기수 집배원은 가까스로 안면읍 신야리에 사는 엄정한씨의 집에 도착했어. 우편물은 〈농민신문〉 하나. 엄정한씨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 “이것 때문에 이 눈길을… 눈보라가 거세지니까 주무시고 내일 가시오.” 오기수 집배원은 고개를 저었어. “우체국에 남은 우편물이 여덟 통 있어요. 내가 돌려야 돼요.” 엄씨가 극구 말렸지만 괜찮다는 말만 남기고 오기수 집배원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지. 이튿날 아침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오기수 집배원을 찾아 나선 우체국 동료들은 벼랑 밑 눈속에 파묻혀 숨진 동료의 시신을 발견했던 거야.

1930년대 소설가 김유정은 그의 소설 〈산골〉에서 이렇게 쓰고 있어. ‘체부(遞夫:집배원)가 잘 와야 사흘에 한 번밖에는 더 들르지 않는 줄을 저라도 모를 리 없고, 어제 다녀갔으니 모레나 오는 줄 번연히 알련마는 그래도 이쁜이는 산길에 속은 사람같이 저 산비탈로 꼬불꼬불 돌아나간 기나긴 산길에서 금시 체부가 보일 듯 보일 듯 싶었던지….’ 이렇듯 오지 않을 집배원임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목을 길게 늘이고 집배원을 기다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못 가는 곳 없이

지난 1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이 우편물에 담겼겠니.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온다던’ 서울 간 오빠의 편지일 수도 있었고, 징용 간 탄광에서 삐뚤거리는 한글로 써 보낸 남편의 편지, 집안의 희망으로 일본 유학 간 아들의 문안, 전방에서 죽을 고생 하는 자식의 사모곡(思母曲), 사법고시 합격을 알리는 환희의 전문, 데모하다 잡혀 들어간 대학생이 시골 아버지에게 드리는 사죄문, ‘내 사랑을 받아주오’ 노래하고 ‘기꺼이 그러겠어요’ 하는 뻐꾸기들의 지저귐들 기타 등등 집배원이 전한 사연들은 삼천리강토를 골고루 덮고도 남을 거야. 그 사연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집배원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충남 천안시에 위치한 우정공무원교육원에 세워진 비석의 글귀)’ 못 가는 곳 없이 발품을 팔았던 거란다.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갔던 거란다.

여담 하나 더 얘기하자면, 경주의 석굴암을 세상에 알린 이도 집배원이었어. 1907년 그때만 해도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던 시절의 경주 토함산을 넘어 동해안 포항 쪽으로 편지 배달을 가던 이름 모를 집배원이 석굴암의 존재를 우체국장에게 보고하면서 새삼 그 존재가 부각됐던 거니까.


ⓒ우정사업본부2011년 8월3일 용인우체국에서 차선우 집배원의 영결식이 열렸다.

우리가 편리하고 안전하기 위해 누군가 몸을 던져 일하고 있다는 걸 항상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사람은 대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게 마련이니까. 〈농민신문〉 하나에 눈보라 속으로 들어가고 엽서 몇 통 때문에 급류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가끔이라도 기억해줘야 할 거야. 2011년 서울·경기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을 때 우편물을 배달하던 차선우 집배원은 도로변 도랑의 배수구에 빨려 들어가 숨지고 말았다. 그는 우편물 여덟 통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 우편물들을 버리고 두 손으로 버텼더라면 충분히 살 수 있었어. 본능적으로 그는 우편물을 거머쥐었고 구하러 온 동료에게 우편물을 건넨 뒤 물살에 휩쓸리고 말았단다. 편지 여덟 통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 오늘도 미칠 것 같은 격무에 시달리면서 가가호호 우편물 집어넣으며 흐르는 땀을 닦는 집배원들에게 감사하자.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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