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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분지]를 생각하다

2017년 10월 18일(수) 제525호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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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자주 가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남정현의 첫 창작집 <너는 뭐냐>(문학춘추사 출판부, 1965)를 빌렸다. 같은 작가의 신간 <편지 한 통-미제국주의 전상서>(도서출판 말, 2017)가 나온 김에, 그의 전작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의 대표작품선 <분지>(도서출판 한겨레, 1987)를 갖고 있지만, 작가의 첫 번째 작품집을 원래 형태 그대로 음미해보고 싶었다.

교정의 나무 그늘 아래를 걸으며 <너는 뭐냐>의 목차를 펼쳐본 나는 기겁을 했다. 목차에 나온 어느 작품의 제목에 먹칠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느 작품인지 뻔히 짐작을 하면서 제목 밑에 적힌 면수를 찾아 본문을 뒤적였다. 그러나 해당 작품은 본문에서 완전히 뜯겨 나가고 없었다. 목차에 먹칠이 되고 본문에서 도려내어진 그 작품은 <분지>다. <현대문학> 1965년 3월호에 발표된 이 단편소설로 인해 작가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작가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은 뒤, 가까스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후 이 작품은 도서출판 한겨레가 남정현 대표작품선을 출간하기 전까지 다시는 인쇄되지 못했다.

ⓒ이지영 그림

한국문학사에 어둡더라도 시사에 밝은 사람에게 ‘<분지> 필화 사건’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런데도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던 이유는 따로 있다. 박정희 정권이 아무리 지독했다지만 반공법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작가의 책을 도서관에까지 추적해서 해당 글을 없앨 줄은 몰랐다. 옛날에 범죄자가 숨으면 절대 끌어내지 못한다는 소도(蘇塗)가 있었던 것처럼, 도서관은 책의 소도가 아닌가. 서점에서 철거되고 대중에게 금지되었다고 하더라도, 연구자의 몫은 남겨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대학원에서 국문학 과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벌써 한두 번쯤 경험했을 일인데, 대학에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초유의 일이다. 도서관까지 뒤져가며 책을 도려냈던 박정희의 유전자가 박근혜에게 대물림되어 블랙리스트가 되었다.

<즐거운 사라> 이후 마광수가 음란물 제조자라는 주홍글자를 붙이고 살았듯이, 남정현 역시 <분지>를 쓴 빨갱이 작가가 되었다. <즐거운 사라>가 마광수의 전모가 아니듯이, <분지>가 남정현의 대표작인 것은 안타깝다. <분지>는 반공이 국시였던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미·반핵을 정면으로 외친 선구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즐거운 사라>의 문학성을 따져가며 작가 구명에 미온적인 이들이 많았던 것처럼, <분지>의 작가가 구명되기 위해서도 문학성이라는 심사대를 필히 통과해야만 했다. 작가들은 체제 저항 작품과 풍속물을 애써 구별 짓지만 검열을 하는 국가는 둘 다를 공평하게 취급한다. 참고로 나더러 <분지>를 평가하라면 “미성년의 정치소설”이라고 했던 어느 평론가의 의견을 따르겠다.

이 소설이 현재진행형으로 읽히는 까닭

단언컨대 남정현은 1960년대에 가장 재미있고 독창적인 소설을 썼던 작가다. 이때 그의 대표작으로 내세우고 싶은 것이 첫 창작집의 표제작 <너는 뭐냐>다. 이 작품에 나오는 관수와 신옥 부부는 많은 점에서 역전된 부부의 위상을 보여준다. 대학을 졸업한 관수는 집안에서 부정기적인 번역 일을 하는 반면,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아내 신옥은 무역회사 사장의 비서로 집안의 경제를 떠맡고 있다. 결혼을 하면 연애 시절의 사소한 채무는 없애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옥에게는 어림없는 일이다.

“안 되지! ‘현대인’의 자격은 말이죠. 우선 금전 거래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신용의 척도만이 그 사람의 인격을 채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탁월한 식견과 비상한 지혜의 소유자라 한들 금전거래에서 한 번 불신임을 당하고 나면 그 즉시로 그 인간은 현대의 대열에서 철거되는 거예요. 이렇듯 이 중요한 금전관계란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처리돼야 하는 거거든요. 당신과 나 사이처럼 아내와 남편 사이라든가 부모와 자식 사이 또는 친구와 친구 사이일수록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뭐냐 말이에요! 암말 말고 어서 갚아요!”

관수에게는 신옥이 첫 여자였으나 신옥은 “현대인의 필수과목처럼 되어 있는 ‘성교육’쯤은 벌써 고등학교 때 완전히 ‘마스타’했다”. 이런 역전은 신옥이 밤늦게 양주 향기를 풍기며 귀가해서 애인과 즐겼던 밀회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진짜 “‘현대인’의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면서 남편에게 자신의 애인인 ‘미스터 안’과 삼자대면을 하자고 조른다. 관수는 발기불능자다. 이들의 부부관계는 일찍이 이상의 <날개> 말고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무역회사 사장 비서인 신옥은 매춘에서 자유로운 금홍이고, <날개>의 다락방에서 수면제를 삼키던 나는 만날 콘사이스나 뒤적이고 앉아 있는 관수로 바뀌었다. <날개>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집을 나가지만 남정현의 작품에서는 신옥이 일방적인 이별을 통고하고 집을 나간다. “먼 나라로 원정이라도 떠나는 ‘스포츠맨’처럼.”

남정현은 분변학(糞便學·Scatology)의 대가다. <분지>가 ‘똥(糞)으로 가득한 땅(地)’을 풍자했듯이, 똥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다. 신옥은 요강을 방에 들여놓고 아침마다 의례를 하듯 방분(放糞)을 한다. 그녀의 요란스러운 방분은 이 부부의 전도된 권력 서열을 보여준다. 신옥은 이 일에 항의하는 남편에게 그녀의 무기인 “현대 생활”을 꺼내든다. 재래식 화장실에는 박테리아가 들끓으니 비위생적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현대란 금전만능·성적 자유·위생학·매스미디어가 가치의 기준인 시대를 말하며, 현대성의 모범적인 구현자로 번번이 미국이 제시된다. 남정현이 똥을 한국 현대문학사에 등재하고 난 한참 뒤에 김지하가 담시 <똥바다>(1974)를 발표하고, 마광수가 문학은 배설이라는 요지의 에세이 <똥타령>(1982)을 썼다. 남정현은 대한민국을 미국에 의해 거세된 나라로 간주했기에 갈데없는 리비도는 분변음욕증을 향했다.

<편지 한 통- 미제국주의 전상서>
남정현 지음
도서출판 말 펴냄
단편소설 세 편을 모은 <편지 한 통-미제국주의 전상서> 가운데 신작은 작가가 2011년 발표한 표제작 한 편밖에 없다(이 책에도 <분지>가 있다). 이 작품은 국가보안법이 자신의 상전이자 조물주인 미국에게 편지를 쓰는 의인화 수법을 취했다. 북한이 핵을 만들게 되자 미국은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게 되고, 졸지에 쓸모가 없어진 국가보안법은 자신이 여태껏 미국에게 바쳐온 충성을 나열하면서 함께 북한을 무찌르자고 하소연한다. 미국은 바짓가랑이를 잡는 국가보안법을 뿌리치면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전쟁이 영 어렵게 되었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라고 되묻는다. 2017년 10월, 이 소설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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