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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자들만 ‘전략 자산’ 노래를 부른다

2017년 10월 23일(월) 제527호
워싱턴·이흥환 기자(1989~1997 재직)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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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언론은 ‘전략 자산’ ‘전략적 유연성’이란 표현을 안 쓴다.

한두 해 전부터 나돌던 국적 불명의 낯선 용어 하나가 급기야 유행어처럼 번졌다. 한국 사람은 발음하기도 어렵고 뭔 뜻인지 알아먹기도 어려운 ‘전략 자산’이라는 말이다. 어떤 방송기자는 자못 비장한 말투로 “미국이 한반도에 전략 자산을 전개했다”라고 하고, 어떤 신문기자는 “한국 국방부 장관이 미국에 전략 자산 전개를 요청했다”라고 전하면서 괄호 안에 ‘strategic assets’라고 영어까지 써넣는다. 한반도 상황을 주시하는 워싱턴·베이징·도쿄의 두뇌들 그 누구도 전략 자산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유독 서울만 하루가 멀다 하고 전략 자산 타령을 해댄다. 미국이 남한에 보내는 핵추진 항공모함이나 핵 잠수함, B1-B랜서나 B-52버프 등 전략 폭격기와 F-35 전투기 등 전략 무기를 그렇게 부른다.


'전략 자산’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조선일보, 동아일보, YTN의 관련 기사들(맨 위부터).


전략 자산이라는 영어는 원래 경제 용어다. 주요 무기 체계를 전략 자산이라고 지칭하면서 군부에서도 더러 쓰긴 하지만 일반화된 말은 아니다. 미국 합참의장 책임하에 발간하는 미국 국방부의 공식 군사용어집에도 전략 자산이라는 단어는 없다. 하지만 미국 국방부 관료들은 언론을 상대할 때 이 단어를 적절히 심심찮게 써먹는다. 핵탄두를 탑재한 전략 폭격기나 핵 항모 등 전략 무기를 동원하는 민감한 군사 작전을 언론에 발표할 때 ‘전략 자산을 전개한다’라고 말한다. 별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은 듯 슬쩍 눙치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이런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국방부 관료의 발표 그대로 “펜타곤이 전략 자산을 전개한다”라고 쓰거나 말하는 기자는 없을 뿐만 아니라, 펜타곤 대변인이 전략 자산 운운하면 “농담할 시간 없다. 어떤 항모를 파견하는 건지 어떤 기종의 전폭기를 보내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라” 하고 닦달해댄다. 우리는 대통령 참모에서부터 국방부 장관, 야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전략 자산 노래를 부른다.

전략 자산이 어쩌다가 ‘서울말’로 굳어졌을까. 미국 국방부의 혈맹 파트너인 우리 국방부가 냉큼 받아다가 기자들 앞에서 써먹었을 테고 국방부 출입 기자들이 덥석 받아먹었을 것이다. 추측일 뿐이다.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군가가 눈알이라도 부라리고 나타났으면 싶다. 그런 사람마저 없다면 우리의 국방부 관료들이 버젓이 미국 국방부 관료들의 말을 쓰고, 미국 기자들은 쓰기 꺼리는 말을 우리 기자들만 열심히 써대는 망측하기 짝이 없는 노릇을 어찌 설명하겠는가. 쪽팔리고 말 일이 아니다. 말은 곧 생각이다. 이 정도면 생각마저도 미국이 된 것이다.

9월4일자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사는 전략 자산이라는 말을 쓰면서 따옴표 안에 넣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가안보위원회에서 일했던 존 울프스탈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한국이 말하는 ‘전략 자산’이라는 건 정권이 ‘안심할 만한 가시적인 것’을 뜻한다. 하지만 안심 보장용 들통은 밑 빠진 독이나 마찬가지다. 뭔가를 부을 수는 있으나 채울 수는 없다. (중략)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잠수함과 전투기를 요구해왔고, B1-B와 B-52 폭격기도 남한에 날아와 체공만 하지 말고 기착해달라는 요구를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여러 이유에서 불가능하다. 첫째, 남한에는 대형 전략 폭격기 B-52가 이륙할 수 있는 긴 활주로가 없다. 둘째, 미국은 그런 첨단 폭격기를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권 안에 갖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전략 자산 못지않게 허무맹랑한 서울말이 또 하나 있었다. 2006년에 퍼졌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단어이다. ‘strategic flexibility’라는 영어를 직역한 말일 텐데 행정부·언론·학계가 얼마나 써댔는지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보다 오히려 ‘스트래티직 플렉서빌러티’라는 괴상망측한 말이 귀에 더 많이 들릴 정도였다.

이 말 역시 진원지는 미국 국방부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국방장관이 된 직후다. 특정 기지에 붙박여 있는 해외 주둔군을 언제 어디로든 파병할 수 있게 신속 기동군으로 재편하겠다는 미군의 새로운 전략 구상을 발표하면서다. 미군이 4년마다 내놓는 ‘4개년 국방 검토(QDR)’ 2001년판에 해외 주둔군 성격 변화에 대한 기본 개념을 상세히 밝혀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도 했다. 미국의 세계 군사 전략의 대변혁을 예고하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고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겠다’는 뜻이라며 미국 군부는 모나지 않게 대응했다. 전략적 유연성은 결국 미군의 특정 군사전략을 일컫는 말도 아니고 미군의 해외 주둔군 검토안에 들어 있는 특정 개념도 아니었다. 미국의 어느 언론도 ‘외부 환경의 주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의 능력’을 지칭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국방부 관료들의 이 용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서울말이 된 워싱턴의 홍보용 선전어


ⓒREUTERS
지난 3월31일 미국 해군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호위함에 둘러싸여 항해하고 있다.

주한미군 문제가 걸려 있는 서울은 신경이 곤두섰다. 서울과 워싱턴은 설왕설래 끝에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하고, 미국은 한국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라고 합의했다. 미국 군부의 대언론용 용어인 전략적 유연성이 한·미 간 합의문에 턱 들어가 앉은 것이다. 이때부터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은 서울에서 ‘미국의 해외주둔군 재배치 전략’으로 뻥튀기되었고, 서울의 기자·PD·교수들은 워싱턴의 미 관료나 한국 문제 전문가들을 만날 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받는 사람들은 어리둥절 표정이 굳었다. 신간을 발행한 출판사에 새 책에 대해 묻는 대신 뜬금없이 글 쓰는 요령에 대해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전략적 유연성은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은 아예 우리 백과사전에까지 올라가 있다.

전략 자산이든 전략적 유연성이든 서울이 쓸 말은 아니다. 더 정확히 하자면 서울이 써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건 워싱턴이 쓰는 말이다. 워싱턴이 워싱턴의 전략과 이익을 위해 채택한 홍보용 선전어다. 베이징도 도쿄도 모스크바도 워싱턴 용어를 그대로 갖다 쓰지는 않는다(평양은 미국을 비아냥거리거나 서울을 조롱할 때 이따금씩 쓴다).

생각과 처지가 다르니까 내가 쓰는 말과 네가 쓰는 말은 다르다. 네가 하는 말을 내가 그대로 갖다 쓰면 나는 그저 네 입일 뿐이다. 마지못해 그런다면 체면만 구기고 말지만 앞장서서 입 노릇을 자청한다면 씻지 못할 죄가 된다. 주는 대로 덥석 받아먹지 말고 가려 먹을 줄 아는 최소한의 안목이 전략 자산이고 그게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이흥환
원 <시사저널> 정치부·기획특집부 기자, 베이징 특파원,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시거 아시아 연구센터 객원 연구위원을 지냈다. 현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KISON(Korean Information Service on Net) 편집위원이다. <대통령의 욕조>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부시 행정부와 북한> <구술 한국 현대사>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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