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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준 한류

2017년 10월 23일(월) 제527호
토론토·성우제 기자(1989~2002 재직)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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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SM타운 월드투어 이후 한류가 북미 지역에서도 확산 되었다.

내가 원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서 중국에 건너가 ‘한류’를 취재한 것은 우리 딸아이가 태어난 이듬해인 2000년이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 케이팝의 출발점이었다면, 2000년 2월 H.O.T.의 중국 베이징 공연은 한류가 세계를 향해 물꼬를 튼 사건이었다. 타이완과 홍콩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 대중음악 바람은 그 공연을 기점으로 중국 대륙 전체로 열풍이 되어 퍼져 나갔다.

그해 9월 내가 베이징과 선양에서 취재할 당시만 해도 중국의 10대가 한국 대중음악에 환호하는 것 자체가 신기해 보였다. 그들은 가수 클론, H.O.T., NRG, 이정현과 탤런트 안재욱(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로 인기를 모았다) 등에 열광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마치 중국 대륙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연합뉴스


내 딸아이가 세 살이던 2002년 우리 가족은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왔다. 한국 대중음악과 드라마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 각광받았으나 북미에는 소개조차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곳 교민들은 여전히 한국 식품점에서 녹화 비디오를 빌려다가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 한두 해 지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대장금> <겨울연가> 같은 드라마의 불법 복제 DVD가 나돌았으나, 케이팝은 물론 한류라는 용어조차 여전히 생소했다.

그즈음 한국 가수가 뉴욕에서 공연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포스터는 맨해튼 32가 한인타운(요즘은 ‘K타운’이라 불린다) 주변에 붙였다. 포스터나 신문 광고를 보고 공연장을 찾는 청중 대다수는 한국과 중국 사람이었다. 한국 언론이 ‘월드스타’라고 치켜세운 가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포스터 붙이기와 같은 전통 방식으로 홍보한 마지막 가수로 기록될 것이다. 한류의 진정한 ‘월드’는 그 직후에 나타났다.

캐나다에 정착한 지 7~8년쯤 지나자 한국 대중문화의 유통 및 소비 양상이 돌변했다. 순전히 인터넷 때문이었다. 급기야 동아시아를 강타한 한류 열풍이 북미 대륙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이던 우리 딸아이도 서서히 관심을 드러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딸아이는 집에서도 한국말 쓰는 것을 어려워했다. 한글학교에도 가려 하지 않았다. 구태의연한 한글 교재를 보고 난 뒤 딸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아이가 우리말과 글 배우기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를 발견한 다음부터였다. 아이는 노래 가사를 받아 적으면서 한글 공부를 스스로 해나갔다.

북미 대중음악의 변방에 있던 한류는 딸아이가 중학생이 될 무렵인 2011년께부터 중앙으로 밀려들었다. 유통되는 방식이 예전과는 판이했다. 과거 텔레비전이 하던 일은 유튜브가 대신했다. 언론은 인터넷 커뮤니티로 대체되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한류가 어떤 내용으로, 어디로,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기성세대는 알 수 없었다.

슈퍼주니어 노래 가사 적으면서 한글 공부

나는 딸아이가 우리 문화를 접하는 것이 좋아서(게다가 우리말과 글까지 저절로 익히게 되니) 한류를 즐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차를 태워주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북미 젊은 대중은 케이팝을 수용하고 즐기는 방식이 적극적이었다. 음악을 듣고 동영상을 찾아보는 것을 넘어, 공연에 대한 갈증까지 자기들 스스로 풀어냈다.

보이 그룹 B.A.P가 신인일 때 토론토에는 벌써 팬클럽이 만들어졌다. B.A.P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먼저 스타가 되었다. 팬클럽을 이끄는 주류는 10대 후반~20대 초반. 그들은 평소 온라인으로 모임을 갖더니 1년에 몇 번이나 파티 형식의 공연을 만들어냈다. 팬클럽 임원진이 미리 모임을 가진 후 커뮤니티센터를 빌려 영상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곳에는 수백명이 모였으나 한국인 팬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형 프로젝트에 영상이 뜨고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B.A.P 멤버들이 직접 참가하지만 않았을 뿐 진짜 콘서트나 다름없었다. 토론토 팬들에게 보내는 ‘소년들’의 영상 편지가 동영상에 나올 때 콘서트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런 모임에 참가하고 콘서트를 만들면서 딸아이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서너 살 많은 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팬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온라인에서 자주 만난 친구들은 미국 디트로이트,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오스트리아 빈, 싱가포르에 사는 언니들이었다. 미국 친구는 토론토로 몇 번 놀러왔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의대생 언니는 B.A.P가 보고 싶어서 가끔씩 운다고 했다. 두 살 많은 싱가포르 언니는 딸아이와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로 거의 매일 만났다. 스카이프로 수학 공부까지 도와주던 그 언니는 이번 학기에 뉴욕으로 유학을 왔다. 딸아이는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뉴욕으로 바로 달려갔다. 몇 년을 사귀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류, 곧 케이팝은 평생 만날 일 없던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관계를 맺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북미 대륙에 퍼지는 속도 또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분기점은 2011년 미국 동·서부에서 열린 대형 공연 <SM타운 라이브 월드투어>. 슈퍼주니어·소녀시대·샤이니·에프엑스 등이 한 무대에 오른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한국 가수의 길거리 공연 포스터는 사라졌다. SM 홈페이지에 공연 소식을 올리면 충분했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공연 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주류 언론들이 공연의 폭발력을 보고 난 다음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요즘도 빅뱅 같은 케이팝 슈퍼스타가 공연을 하면 팬들은 두 가지 전쟁을 치러야 한다. 첫 번째는 티켓 구하기. 집에서는 인터넷 속도가 느려서 표를 구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티켓은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 한 번 실패를 맛본 뒤 딸아이는 피시방에 가거나 뉴욕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표를 구한다.

두 번째 전쟁은 공연장 찾아가기. 2011년 10월23일 <SM타운 라이브 월드투어 인 뉴욕>을 보려고 나와 딸아이는 새벽에 일어나 1000㎞ 가까이를 운전해서 갔다. 10시간 운전은 내세울 거리도 못 된다.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15시간,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서 2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온 여학생들도 있었다.

북미 지역의 SM 라이브 투어 이후 팔다리와 몸이 모두 길쭉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케이팝을 주도하기 시작했다면, 팔다리와 몸이 모두 짧은 나이 많은 싸이가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팝의 정점을 찍었다. ‘강남 스타일’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케이팝을 생활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는 것. ‘강남 스타일’은 1990년대 ‘마카레나’처럼 파티의 군무곡으로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일사불란한 군무, 윙크와 눈웃음, 손짓 같은 특유의 애교를 끼워넣은 춤동작, 섹스·음주·클러빙 같은 내용이 없는 노래, 철저한 관리를 통한 아이돌 스타의 산뜻한 이미지 등이 케이팝이 지닌 장점. 그러나 바로 그 장점이 케이팝의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공장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는 아이돌 스타들은 반짝 성공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싸이와 같은 폭발력을 보인다거나 롱런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미국 주간지 <뉴요커>는 ‘SM 군단’이 미 대륙에 상륙할 당시 케이팝 분석 기사를 ‘팩토리 걸스-문화 기술과 케이팝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9쪽에 걸쳐 상세하게 게재했다(2012년 10월8일자). 이 기사를 작성한 존 시브룩은 “나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케이팝 소년 그룹이 미국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겠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살아서 꿈틀대는 문화는 늘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 케이팝을 필두로 한 한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을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듯이, 앞으로의 성공 혹은 실패를 섣불리 단정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5년이 지난 지금 <뉴요커>의 예상 또한 보기 좋게 빗나갔다.

ⓒJac Viner 제공
9월8일 토론토에서 열린 혁오밴드 공연 모습.


대중문화에서 취향 문화로 진화하는 한류


‘강남 스타일’처럼 단기간에 큰 인기를 모은 쓰나미 같은 곡은 없으나, 여러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은 세계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그 생명력을 여전히 유지해나가고 있다. 내가 보기에, 최근 한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청중 1만명을 모으는 큰 공연 하나가 아니라, 1000명이 모이는 작은 공연 열 개가 북미 대도시에서 수시로 열린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토론토에서 케이팝 스타가 공연하면 뉴스거리가 되었으나, 지금은 토론토 개봉관에서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 9월 대학에 입학한 딸아이가 최근에 본 콘서트는 9월8일 ‘혁오밴드’ 토론토 공연이었다. 요즘은 자동차를 함께 탔다 하면 딸아이는 아이유의 <꽃갈피>를 틀어놓는다. 엄마 아빠의 취향을 배려한 선곡이다. 1999년에 태어난 딸아이도, 그즈음에 움트기 시작한 한류도 이제는 모두 성년이 되었다.


성우제
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입사해 주로 문화부에서 일했다. 미술과 문화 현상에 관한 기사를 썼다. 2002년부터 캐나다 토론토에서 살고 있다. <느리게 가는 버스> <커피머니메이커> <외씨버선길> <폭삭 속았수다> <딸깍, 열어주다> 같은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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