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익
1989년 10월 원(原) 〈시사저널〉에 입사해 편집부·경제부·특집부·사회부 등 여러 부서에서 일했다. 〈시사저널〉이 부도난 후 독립신문사에 인수된 때 2년간 편집장 노릇을 했다.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신나게 관전한 뒤 휴직계를 내고 시애틀에서 2년간 열심히 놀았다. 복직을 준비하던 중 “금창태가 ‘사장직을 걸고 김상익이 돌아올 자리는 없애겠다’고 말했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귀국 후 몇 달 싸우다 사표를 내고 그만뒀다. 지금은 더 열심히 노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일렉 기타 강습을 받고 있다.





이문재
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 1989년부터 2005년까지 근무했다(1998~1999년 잠시 문학동네 편집주간으로 가 있었다). 주로 문화부에서 활동했고 말년에 편집위원, 취재총괄부장을 맡았다. 특종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지면을 많이 메우는 데 주력했다. 건축, 도시, 대중문화 등 새로운 기사 장르를 개발하고 몇몇 필자를 발굴하기도 했다. 40대 중반 명예퇴직을 한 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와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기사를 쓰기 전부터 시를 써왔다. 틈틈이 시를 발표해 그간 〈지금 여기가 맨 앞〉 〈제국호텔〉 등 시집 5권과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와 같은 산문집을 냈다.   



서명숙
대한민국에 ‘올레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주인공. 걷기 여행 열풍을 일으킨, 걷는 길 올레를 내는 여자. 1957년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출생. 원 〈시사저널〉 정치부 기자, 취재1부장, 편집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내며 23년을 기자로 살다가, 남들이 다 말리는 ‘미친 꿈’에 빠져 길을 내는 사람이 되었다. 〈제주올레여행-놀멍 쉬멍 걸으멍〉 〈흡연 여성 잔혹사〉 〈식탐-길 내는 여자 서명숙 먹으멍 세상을 떠돌다〉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영초언니〉 등을 펴냈다.



김현숙
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입사하여 문화부 팀장으로서 1994년 윤이상을 인터뷰했다. 인민군 출신의 포로이며 중립국을 선택했던 주영복 소좌 발굴 기사로 특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케이무비러브 (Kmovielove.com) 대표로, 주한 외국인 영화감독들과 국제이방인영화제(KIXFF.com)를 열고 있으며, 매주 수요일 광화문 ‘전성기캠퍼스’(서울 종로구 삼봉로 48)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화 상영회(02-6333-1900)도 연다.




허광준
원 〈시사저널〉 공채 1기 선발 때 면접까지 갔다가 떨어지고 앙앙불락하여 1년 반 뒤 다시 시험을 쳐 2기로 입사했다. 기자로서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으나, 대신 인생 4대 멘토 중 3명을 만나는 실속을 챙겼다. 미디어를 더 공부하겠다고 미국으로 건너가, 지겨울 정도로 오랜 세월 끝에 박사가 아닌 ‘박수(박사 수료)’가 되었다. 인터넷 자유를 주창하는 사단법인 오픈넷에서 1년4개월 근무했다. 현재는 ‘들풀미디어아카데미’에서 세상과 사람과 매체를 향한 짝사랑을 여전히 불태우고 있다.






장영희
1989년 8월 원 〈시사저널〉의 공채 창간 요원이 되었다. 경제 기자로서 재벌 개혁 이슈, 특히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문제에 매달리다, 2005년 9월 추석 합병호(제830·831호) 때 75쪽에 달하는 거의 통권기획 ‘삼성은 어떻게 한국을 움직이나’를 책임 기획하고 커버스토리를 썼다. 2006년 6월 데스크(취재총괄부장)로 문제의 삼성 관련 기사를 세상에 내놓아 ‘〈시사저널〉 사태’의 한복판에 섰다. 편집권 독립 투쟁이 무위에 그쳐 2007년 6월 〈시사저널〉과 결별하고 〈시사IN〉 법인 설립과 창간 작업에 사활을 걸었다. 2008년 말 ‘데드라인’을 벗어났다. 지금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과 시청자 방송 참여를 지원하는 공공기관인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흥환
원 〈시사저널〉 정치부·기획특집부 기자, 베이징 특파원,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시거 아시아 연구센터 객원 연구위원을 지냈다. 현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KISON(Korean Information Service on Net) 편집위원이다. 〈대통령의 욕조〉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부시 행정부와 북한〉 〈구술 한국 현대사〉 등을 썼다.






김상현
1991년부터 5년간 원 〈시사저널〉 편집부·사회부·문화부 등에 몸담았고, 2001년 캐나다로 이주할 때까지 여러 시사 주간지와 닷컴 기업들에서 일했다. 이후 캐나다 온타리오와 앨버타 주정부의 여러 부처에서 산림관, 정보공개 담당관, 개인정보 관리 책임자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First Nations Health Authority’에서 개인정보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디지털 휴머니즘〉 〈불편한 인터넷〉 〈보안의 미학〉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디지털 파괴〉 〈공개 사과의 기술〉 등을 번역했다.






박성준
1990년 10월 원 〈시사저널〉에 입사하여 2006년 5월까지 약 15년간 근무했다. 사회부·문화부·국제부 등에서 교육·출판·학술·한반도 문제 등을 취재했다. 현재 한국해양수산연구원 국제물류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남북 협력, 북방 물류 분야의 연구 사업을 수행 중이다.








안철흥
원 〈시사저널〉 정치팀과 문화팀 기자로 일했다. 새정치국민회의 시절 여당 출입을 시작해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걸 지켜본 뒤 정치팀을 떠났다. 문화팀에서는 학술·문학·건축·영화 등 주로 ‘올드’한 장르를 맡았다. 정치팀 시절 데스크는 서명숙이었고, 문화팀 시절 데스크는 이문재였다.
첫 문화 기사를 마감하자 이문재 데스크가 불렀다. “네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느냐?” “아뇨.” “알았다.” 프로필을 적으려니 갑자기 그때 문답이 떠올랐다.
참, 〈시사저널〉 파업 때 노조위원장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구글에 내 이름을 입력하면 머리띠 두른 모습이 줄줄이 튀어나온다.




성우제
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입사해 주로 문화부에서 일했다. 미술과 문화 현상에 관한 기사를 썼다. 2002년부터 캐나다 토론토에서 살고 있다. 〈느리게 가는 버스〉 〈커피머니메이커〉 〈외씨버선길〉 〈폭삭 속았수다〉 〈딸깍, 열어주다〉 같은 책을 펴냈다.








고명희

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입사하여 1992년까지 실용뉴스부와 문화부에서 일했고, ‘거리의 화가들:영화 간판을 그리는 사람들’ 등의 기획기사를 썼다. 1992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1대학 미술사학과에서 DEA 과정을 마쳤다. 월간 미술잡지 〈미술세계〉에서 2006~2012년 파리의 전시 소식을 알리는 통신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 초등학교에서 파트타임 장애아 교사로 일하며 몇 년 전 시작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안병찬
1962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사이공 특파원,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며 언론계에서 ‘저널리즘의 철저한 행동성과 다부진 추진력’으로 정평을 얻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역사성과 문학성을 지양하는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을 신봉해 1975년 4월30일 사이공 최후의 상황과 정면 대결하면서 처음으로 르포르타주 저널리즘을 실험하고자 했다. 1989년 원 〈시사저널〉 창간에 합류해 시각적 뉴스 주간지의 지평을 열었다. 정치언론학 박사로 경원대 교수, 언론인권센터 이사장을 지냈다. 〈사이공 최후의 새벽〉 〈중공·중공인·중공사회〉 〈신문기자가 되는 길〉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안병찬-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의 탐험〉 〈미디어와 사회〉 〈뉴스 저널리즘 실무 특강〉 등을 펴냈다.



김성원
원 〈시사저널〉 창간 준비 초기인 1989년 7월에 미술부 기자로 입사했다. 편집 디자인을 하며 당시 〈US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지에서 조언하러 온 테일러 씨와 원 〈시사저널〉 아트디렉터로 남게 된 재니스 올슨 씨를 위해 간간이 통역을 하면서 1995년 다른 시사 주간지의 아트디렉터로 이직할 때까지 머물렀다. 훗날 내조를 위해 거듭했던 퇴사로 인한 ‘경력 단절녀’로서 할 줄 아는 게 영어와 디자인밖에 없어서 영어교육계와 출판계를 넘나들며 지내왔다. 현재는 사사 편찬 전문대행사에서 PM질을 하며 살고 있다.


백승기
원 〈시사저널〉에서 쫓겨난 기자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죄로 〈시사IN〉 초대 대표이사·발행인을 맡았다. 〈시사IN〉이 부도가 났다면 그나마 있던 집 한 채마저 날릴 판이었는데도 신나서 지출 서류에 사인을 할 정도로 철이 없다. 의외로 뒤끝 작렬이어서 전 직장에서 악명을 떨쳤던 자들이 밤길에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 몽블랑, 마터호른 등 알프스의 준봉 10여 곳 등정이라는 오래된 꿈을 이룬 뒤 〈시사IN〉에서 사진 기자로 정년퇴직을 했다. 현재는 우쿨렐레와 그림에 흠뻑 빠진 베짱이 삶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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