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이 기타를 친다. 연주곡은 〈사라방드 (Sarabande)〉. 스크린에는 연주자의 구부정한 상반신과 투박한 손가락이 번갈아가며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 느린 곡조 사이에 ‘잡음’이 섞여들었다.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가 처음 상영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은 돌림노래 부르듯 흐느꼈다.

연주자는 ‘91년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씨다. 1991년 5월8일 전민련 간부 김기설씨가 분신자살하자 강씨는 그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았다. 재심으로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24년이 흘렀다. 그동안 강기훈씨는 간암을 얻었다. 영화는 강씨의 기타 연주회를 매개로 ‘1991년의 사람들’을 다룬다. 권경원 감독은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음악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첫 장편영화다. 왜 강기훈이었나?

나는 91학번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목격한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트라우마가 서른 살 넘어서도 지속됐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기를 기록해야겠다는 책임의식이 있었다. 그 기억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2011년 강기훈씨를 만났고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찍었다.

ⓒ시사IN 이상원91학번인 권경원 감독은 “어떤 방식으로든 1991년을 기록해야겠다는 책임의식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1차 목표는 ‘강기훈’을 없애는 것이었다. 사건이 피해자 이름으로 기억돼선 안 된다고 여겼다. 영화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제목은 ‘선곡’이었지만 내용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강기훈 말고 강기타’도 가제였는데 “강기훈도 모르는데 강기타는 뭐야?”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국가에 대한 예의’는 1991년 살아남은 사람들의 태도를 뜻한다. 국가에 의해 극도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 영어 제목은 ‘Courtesy to the Nation’이다. 국가뿐만 아니라 국민, 사회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강씨의 기타 연주곡으로 영화를 전개했다.

자료를 모으던 2013년, 강기훈씨가 지인 10여 명 앞에서 연 기타 연주회에 가게 됐다. 연주하는 곡 제목들이 심상치 않았다. 〈눈물(Lágrima)〉 〈망각(Oblivion)〉 〈이별의 전주곡 (Preludio de Adios)〉 이런 식이다. 평소 감정 표현이 적은 그가 선곡으로 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로페셔널이 아니기에 박자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카바티나(Cavatina)〉만은 거의 실수가 없었다. 영화 〈디어 헌터〉의 엔딩곡인데,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군인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노래다. 20년 이상 고립되었다가 끝내 암 진단을 받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곡을 쳤을까. 찍다가 손이 덜덜 떨려서 카메라를 내리고 눈으로 봤다. 결국 내 위치에서 찍은 영상은 흔들려서 쓰지 못했다. 그가 연주로 한 이야기를 살리기 위해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세월호 사건 다음 날에도 연주회를 열었다.

강기훈씨의 딸이 단원고 희생자들과 동갑이다. 뉴스를 본 강씨는 아침부터 내내 연주회를 취소할지 고민했다. 예정대로 하게 된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희망을 가져서였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참사 때처럼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 그 뒤 전개를 지켜보던 그는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다. 죽음 자체도 그랬지만 국가가, 언론이, 여론이 어떻게 피해자들을 몰고 갈지 눈에 선했던 것이다. 본인은 하나지만 유가족들은 500명 이상이니까. 잠도 못 자고 수시로 식은땀을 흘렸다.

재판과 투병 와중에도 강기훈씨가 여러 차례 연주회를 연 까닭은?

관객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 한다고 답하더라. “제가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라면서. 나는 강기훈씨가 기타로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느꼈다. 사건 속에 박제된 인물이 아니라 ‘인간 강기훈’을 음악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독이나 분노가 정점에 이를 때 사람은 어디서 구원받을까? 타인은 아니다. 사람들은 2차 가해로 고통을 줬다. 구원이 업이라는 종교조차 힘이 되지 못했다. 강씨를 달랜 것은 오직 예술이다. 당시 고통받은 분들에 대한 팩트를 나열하기보다는 음악을 강조했다. ‘정치 영화’가 아니라 ‘음악 영화’인 이유다. 강기훈의 〈카바티나〉 한 곡을 위해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화에서 강기훈씨는 “카메라가 불편하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한다.

대인기피증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연락 없이 직장에 오는 기자, 어머니와 아내 될 사람을 찍는 카메라에 시달렸다. 최대한 거리를 지켰다. ‘리얼한 밀착 다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프레임을 만들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을 대하는 데에 우리는 서툴다. 피해자는 늘 슬프거나 교훈을 줘야 하는 인물이라고 묘사하지 않으려 애썼다.

ⓒ시사IN 신선영1991년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씨는 24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엔딩곡은 클래식이 아니라 록음악을 넣었다.

원래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엔딩곡인 비틀스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도 즐겨 듣는 노래인데, 그룹 ‘빛과소금’ 멤버였던 장기호씨가 불렀다. 가사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들어 있어서 꼭 넣고 싶었다. 기타 소곡이 나오다가 갑자기 록이 들리면 이상할 것 같았지만, 장르 대신 ‘인적 연속성’을 꾀하는 편이 낫다고 봤다. 강기훈씨와 비슷한 세대의, 비슷한 내면을 가진 목소리였다.

대학 시절인 1990년대 초·중반은 어땠나?

1991년 대학 1학년 때 국내 최초의 노래방이 여기 부산에 생겼다. 1987년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노래방에서 김광석 노래를 불렀다. 1996년에 학생운동을 하다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자 보통 사람들은 “왜 지금?”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1987년 승리했던 운동권 선배들은 “아직도 학생운동 하냐?”라고 비웃었다. 당연히 모순이 있으면 운동하는 거고, ‘공안’이라는 직업이 있는 한 잡혀가는 사람도 있다. 국가 폭력이 각 개인의 인생을 침탈할 때 서로서로 붙잡고 있지 않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분명 1990년대의 나는 이겨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러나 1991년이 패배의 역사라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패배다.

대학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해왔나?

1997년 영화 〈넘버 3〉 제작부 막내로 들어갔다. 대사도 몇 줄 써보고 많이 배웠다. 그 후에는 독립영화 관련한 소소한 일들을 했다. 영화 현장 일은 2009년쯤 각색 하나 끝낸 게 마지막이었다. 밥벌이는 해야 하니까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스스로 농담 섞어 ‘경력 단절 영화인’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연재한 스토리펀딩 ‘강기훈 말고 강기타’에 4000만원이나 모이면서 겨우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서울 가면 다시 애들 가르쳐야 한다. 월세 내야 하니까.

추후 상영이나 영화관 개봉 일정은?

11월9일 열리는 제4회 ‘사람사는세상 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된다. 영화가 부산영화제 일주일 전에야 완성된 상황이어서 개봉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큐멘터리는 고치면서 완성도가 더 높아지기 때문에 편집하면서 알아봐야 한다. ‘개봉하고 끝’식이 아니라, 기록이 오랫동안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 틀을 모색해보고 싶다. 내가 독립영화계 안에서도 이방인이라, 다른 분들이 모델로 삼을 만한 길을 찾아보려 한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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