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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부산국제영화제가 주목한 아시아 신인 감독 영화

2017년 10월 31일(화) 제528호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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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풍을 견뎌온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21일 폐막했다. 영화제는 초심을 가다듬으면서 ‘새 얼굴’을 알리기 위해 분주했다. ‘영화제의 백미’로 꼽히는 아시아 신인 감독의 영화 3편을 소개한다.

‘비정상의 정상화.’ 역설적이게도 10월12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필요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옛 슬로건이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을 다룬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하자 청와대는 전방위적 공세에 나섰다. 지원금은 대폭 삭감되고 이용관 집행위원장은 재판을 받았다. 다수 영화인이 여기에 반발하여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불참했다. 20년간 쌓은 ‘아시아 최대 영화제’의 명성에 크게 금이 갔다.

표현의 자유는 개막일부터 강조됐다. 개막작 <유리정원>을 내놓은 신수원 감독은 “운 좋게 피했을 뿐 나도 블랙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비상식적 행위이다”라고 했다. 뉴커런츠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올리버 스톤 감독은 같은 날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영화에) 정부 영향력이 강했던 것 같다. 박근혜 정부도 그랬다”라고 말했다. 10월15일 현직 대통령 최초로 영화제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겠다”라는 원칙을 천명했다.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 올리버 스톤 감독.
그는 기자회견에서 “올해 뉴커런츠 진출작을 관통하는 정서는 ‘절망’이었다”라고 말했다.

주최 측은 지난 5월18일 사망한 고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기리며 초심을 가다듬었다. 모든 영화 시작 전에 ‘In loving memory of KIM Jiseok(김지석을 추억하며)’이라는 문구를 띄웠다. 김지석씨는 1996년 출범부터 부산국제 영화제와 함께한 인물로, 생전 박근혜 정부의 영화제 개입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시사IN> 제431호 ‘검열 인정하는 순간 영화제는 2류 된다’ 기사 참조).

기로에 선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어떤 영화를 선정했을까? 뉴커런츠 부문 영화 10편 중 3편을 소개한다. 아시아 신인 감독의 장편영화를 상영하는 뉴커런츠 부문은 프로그래머들에게 ‘영화제의 백미’로 꼽힌다. 외풍을 견뎌온 부산국제영화제의 ‘반전’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스포일러 있음).

■ <죄 많은 소녀>, 판을 엎다


영화는 학생의 수화로 시작한다. 수화를 알지 못하는 관객들은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여러분이 정말로 기다리던 친구가 돌아왔다”라는 담임교사의 소개와, 같은 반 친구들의 긴 박수소리로 짐작만 할 뿐이다. 영화 후반부에 이 장면은 한 번 더 반복된다. 이번에는 자막이 깔렸다. 객석 여기저기에서는 ‘헉’ 하고 숨을 멈추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화의 의미를 알아차린 관객에게 학생의 얼굴은 전혀 달리 보인다.

극의 배경은 여자고등학교이다. 고등학생 경민이 실종되자 전날 밤 함께 있던 영희는 경찰에게 추궁당한다. 경찰은 물론 경민의 어머니와 담임교사, 다른 학생들도 영희가 친구에게 자살을 부추겼다고 여긴다. 영희는 갖은 방법으로 결백을 주장하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같은 반 친구들은 영희의 집을 찾아가서 구타한다. 학교 친구들과 교사들이 참석한 경민의 장례식에서 영희는 양잿물을 마신다. 목숨은 건졌지만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영희에게 친구들은 화해의 손을 내민다. 다른 아이가 영희 대신 따돌림을 당한다.

영화 <죄 많은 소녀>는 판을 엎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의석 감독은 “내가 겪은 사건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죄 많은 소녀>는 판을 엎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가진 게 있는 인물들은 곤경이 닥쳐도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다. 윗선의 독촉을 받은 경찰 수사관은 사건 조사를 대충 마무리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에게 담임교사는 폭언과 폭력으로 맞선다. ‘일진’ 학생은 상황이 바뀔 때마다 왕따를 만들어 책임에서 빠져나간다. 반면 영화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세 사람은 처지가 다르다. 결백을 주장할 방법으로 자살을 택한 영희만이 아니라, 경민과 경민 어머니 역시 상황을 반전할 수단이 자기 목숨뿐이라고 판단한다. 살아서 견뎌야 하는 고통이 죽음보다 크기 때문일까? 영어 제목인 ‘After my death’는 조금 더 위험한 해석의 여지를 둔다. 죽음을 결심한 세 사람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감정은 체념보다 욕망이다. ‘가진 게 없으면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기겠다’는, ‘피해자’들의 얼굴에서 읽고 싶지 않은 의지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목에 구멍이 뚫린 소녀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에 수차례 나이프를 꽂으려는 장면이 영화의 백미다.

<곡성> 연출부였던 김의석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김 감독은 자신이 겪은 사건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내가 느낀 정신적 혼란, 내가 본 인간성의 한계, 무엇보다 나 자신의 비열함을 내뱉고 싶었다. 배우 하나하나와 오랜 시간 대화하며 그들의 경험도 녹였다. 투박할 수는 있지만 최선을 다해 울부짖는 마음으로 찍은 영화다.”

■ 끝 모를 빈곤의 풍경, <폐색>


“부산에서 본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영화는 대체로 희망이 없는 사회 분위기를 다룬다.”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올리버 스톤 감독이 한 말이다. 이란 영화 <폐색>은 이 말을 뒷받침하는 대표 사례다. 모흐센 가라에이 감독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테헤란 뒷골목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가셈은 테헤란 거리의 노점상을 단속하는 구청 임시직이다. 장인의 ‘백’으로 겨우 얻은 직장인데, 노점상에게 뒷돈을 받은 일이 발각되어 재계약이 어려운 상황이다. 성격이 거친 가셈은 주변 사람들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킨다. 아내와의 갈등이 가장 문제다. 가셈 부부는 아내 몫의 유산을 어떻게 쓸지를 두고 다툰다. 아내는 집을 마련해 시댁에서 독립하자고 하는데, 가셈은 트럭을 할부로 사서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이 와중에 늙은 노점상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단속 과정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며 가셈의 집과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린다. 어쩔 수 없이 노점상을 돕던 중에 큰돈을 발견한 가셈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란의 모흐센 가라에이 감독(아래)은 영화 <폐색>을 통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테헤란 뒷골목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에는 ‘빈곤’이란 단어를 풀어서 설명하는 듯한 장면이 여럿 있다. 노점상은 자신의 생니를 뽑아서 구청에 간다. 그는 가셈에게 “휴대전화를 찾아주지 않으면 당신에게 맞아서 이렇게 됐다고 고발하겠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가셈이 멋대로 트럭을 사버리자 임신한 그의 아내는 집을 나간다. 남편에게 그녀는 “트럭을 환불하지 않으면 당장 낙태하겠다”라며 부엌칼을 집어 든다. 가셈과 붙어 다니는 동료 단속원은 내내 눈물을 흘린다.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하지 못하는 눈병 때문이다. 가셈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버지가 무능한 게 내 탓이야?”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부는 거창하지 않다. “집도 있고 트럭도 있는 놈들”이라는 대사에서 관객 몇 사람이 씁쓸하게 웃었다.

모흐센 가라에이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제복을 입은 가셈과 좌판을 벌인 노점상들의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서로 싸워야 살아갈 수 있는 빈곤층에 주목했다”라고 말했다. 사실 카메라가 쫓는 가셈의 일상에 부유한 인물은 전무하다. 가셈과 마찰을 빚는 일가친척, 직장 동료, 장물아비 모두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이 일단락된 뒤에도 가셈의 얼굴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동료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묻자, 가셈은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라며 눈을 감는다. 가셈 역을 맡은 배우 하메드 베다드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했다. “단순히 피곤하다는 뜻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닥친 현실에 눈을 닫고 싶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중국 사회 군상들의 후일담, <여름의 끝>


1987년생 중국 감독 저우취안의 첫 장편이다. 여러모로 뉴커런츠 부문 다른 영화들과는 차이가 뚜렷하다. 우선 스케일이 크다. 중국 거대 기업 텐센트 펭귄픽처스가 투자에 참여했고, 다수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한 테런스 창이 총괄제작자로 붙었다. 이 부문 출품작으로서는 흔치 않게 밝은 영화이기도 하다. 객석을 가득 채운 중화권 관객들은 수시로 웃음을 터트렸다.

1998년 중국 양쯔강 하류에 있는 시골 마을 이야기다. 초등학생 샤오양은 축구부에 들고 싶어 하지만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옆집 할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다니며 축구를 연습하고 텔레비전으로 월드컵 경기를 관람한다. 그러던 중 샤오양은 아버지가 새로 온 여자 선생님에게 마음을 빼앗긴 모습을 목격하고 반항하기 시작한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샤오양을 감싸주던 옆집 할아버지는 아들을 따라 마을을 떠난다. 샤오양은 할아버지가 선물한 축구 유니폼을 입고서 혼자 연습을 한다. 공감하기 쉬운 소재에 중국 특유의 배경을 버무린 성장 드라마로만 감상해도 ‘예쁜 영화’다.

중국의 저우취안 감독(아래)이 만든 장편영화 <여름의 끝>은 개혁·개방 정책으로 생긴 신구 갈등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조금 다른 각도로 뜯어볼 수도 있다. 1990년대 말은 중국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던 시기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생긴 신구 갈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가령 샤오양의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대하는 아내는 유명한 중국 전통극 배우인 반면, 그가 구애하는 젊은 여자 선생은 학부모들에게도 영어 대화를 권하는 열성 영어 교사다. 옆집 할아버지가 “여기서 죽을 것”이라던 시골 마을에는 손자의 묘소가 있다. 그러던 그가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사하는 곳은 덩샤오핑 개혁·개방 정책의 최전선인 선전 경제특구이다. 샤오양의 아버지는 아들을 강압적으로 억누르지만 옆집 할아버지는 “아이는 스스로 크는 거야”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동경해서든 떠밀려서든 결국에는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 중국 사회 군상들의 후일담이다.

저우취안 감독은 영화 주인공 샤오양과 닮은 점이 많다. 비슷한 또래에 양쯔강 남부 출신이며, 이탈리아 전 축구선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광팬이다. 그는 “외국 관객들이 영화에 등장한 중국 풍경이나 문화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전통문화를 해외로 전파시키는 메신저 노릇을 겸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1998년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중국 젊은 세대의 자신감이 엿보인다. 아마 대륙의 ‘샤오양’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 훨씬 원만하게 과거의 중국과 작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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