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는 일종의 공공자문(public consultation)이라 할 수 있다. 공공자문은 민주적 정부가 공공정책을 추진하면서 채택해야 할 필수적인 제도이다. 선출된 공직자나 직업 공무원이 ‘시민을 위한 정책’을 수행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신의 이익이나 특정한 집단의 이익만을 챙길 수 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책 대상자인 시민의 목소리를 정책 과정에 적절하게 반영할 필요가 있다.

주권자는 자신이 선출한 공직자가 추진하는 정책이 과연 내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는지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해당 정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공공자문이란 이를 실현하는 제도이다.

공공자문은 실로 간단한 민주적 원리를 따른다.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때, 그에 영향받을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해당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이는 일견 자명하게 들리지만 실현하기 쉽지 않다. 정부나 지자체가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행하는 이른바 ‘공청회’를 공공자문의 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공청회들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피상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다. 이런 공청회를 제대로 된 공공자문이라 하기 어렵다.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를 개발한 제임스 피시킨 스탠퍼드 대학 교수는 8가지의 공공자문 방법이 있다고 제시한 바 있다. 공공자문에 참여하는 자를 선택하는 방식을 참여자가 임의로 하는 ‘자기 선택’, 일반적인 할당표집 방법을 사용하는 ‘비확률적 표집’, 모집단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무선표집’, 그리고 참여자 선택의 방법을 두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는 ‘비표집’ 등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4가지 참여자 선택 방법에 참여자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갖는지에 따라 구분하면 8가지 공공자문의 방법을 얻을 수 있다(위 표 참조).

8가지 공공자문 중에는 시민 참여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인터넷 청원’과 같은 방법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할당표집(quota sampling)을 적용한 일반 여론조사가 있다. 이런 방법은 손쉽게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순 있지만, 수렴된 의견이 전체 유권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특성을 갖는다. 또한 이렇게 수집한 의견의 품질이 대체로 낮은 경향이 있다.

주권자 전체가 아닌 그들을 대표하는 집단을 만들되, 인터넷 청원이나 일반 여론조사와 같은 낮은 품질의 의견을 수집하는 것이 아닌 실체적 토론에 기초한 ‘숙고된 의견’을 확인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것이 공론조사다.

ⓒ연합뉴스10월13~15일 충남 천안 계성원에서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결정할 시민참여단의 종합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초기에 약간 혼란스러웠던 점 중의 하나가 공론조사를 시민배심원 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착각했던 데 있다. 시민배심원 제도는 ‘합의 도출’을 목적으로 하지만, 배심원의 수가 제한되기 때문에 모집단을 대표하는 무선표집(random sampling)을 적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론조사와 다르다. 

시민배심원 제도는 1970년대 미국의 네드 크로스비가 개발한 주민정책 개발 모형이다. 시민배심원은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는 20명 내외의 적은 인원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심원들은 사전에 잘 검토된 국지적 정책 사안에 대해서 며칠에 걸쳐 심의를 하고, 최종 합의를 도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독일·이탈리아·영국 등 유럽 국가들의 지방정부는 이 제도를 도입해서 지역정책 개발, 에너지 대안정책 심의, 환경정책 심의, 지역사회 윤리적 규제 등에 적용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시민배심원 제도는 배심원들이 최소한의 대표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할당표집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배심원 참여자의 성·연령·직업 등을 고려한 참여자 배분에 가까운 것으로서 모집단 특성을 반영하는 확률적 표집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시민배심원 제도의 특성상, 확률적 표집의 원칙에 맞는 규모로 충분한 수의 표본을 구성하기도 어렵다.

공론조사는 모집단을 대표할 수 있도록 무선표집을 적용해서 참여자를 선정한 후,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학습자료 제공, 분임토의, 전문가 토론 등 기회를 주어서 참여자들이 ‘숙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는 참여자들의 합의를 유도한다기보다 숙의를 통한 여론의 변화를 검토함으로써 정책적 판단의 기초자료로 삼는 제도이다. 정책에 대한 가부간의 ‘결단’을 내리자는 방법이 아니다. 해당 정책과 관련한 다양한 고려 요인을 충분히 검토하고 고민했을 때 시민들이 어떤 의견의 변화를 보일지 실험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잘못된 공론조사는 여론 조작의 가능성 커

공론조사를 수행한다고 해서 저절로 대표성이 보장되고, 고품질 의견의 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참여정부는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부하에서도 ‘공론조사’ 또는 ‘숙의형 여론조사’라는 이름을 가진 조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확률적 표집방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거나, 참여자 간 분임토의와 전문가 질문 등을 생략하고 텔레비전 토론이나 비디오 시청으로 대체하는 등 방법론에서 최소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연합뉴스10월20일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권고 소식에 한 시민이 눈물을 보이고 있다.
사회과학 방법론적 원칙을 지키지 못한 공론조사를 수행하면 정책 추진의 근거 자료를 확보하기는커녕 오히려 비판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특히 ‘결과를 정해놓고 공론조사를 흉내 낸다’ 또는 ‘공론조사를 수행한다며 여론 조작을 수행한다’ 같은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비난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비난을 극복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다. 방법론적 원칙을 지키면 된다. 비용과 수고가 들더라도 대표성을 보장하는 무선표집 원칙을 최대한 준수하고 공정한 토론 규칙을 채택해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공론조사 참여자의 숙의를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심지어 방법론적 원칙을 지켜 공론조사를 수행했다 하더라도 헤쳐 나가야 할 과제들이 등장한다. 기존 공론조사에 대한 비판론자 중에는 공론조사 결과가 여론의 변화를 확증하고 다수파의 형성을 제시하더라도 이를 숙의의 결과라고 간주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3가지 경우가 그것이다. 첫째, 공론조사 참여자들이 전체토론이나 분임토의에서 다수 의견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에 동조하거나 전략적으로 반대할 수 있다. 둘째, 참여자들 간에 사회적 지위나 교육수준이 높은 자들, 또는 이념적으로 강력한 의견을 가진 자들이 분임토의를 주도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다. 셋째, 의견 변화가 발생하더라도 다수파가 형성되는 방식이 아닌 ‘양극화(polarization)’로 인해 의견의 분화가 일어날 수 있다.

공론조사 설계를 제대로 함으로써 위의 반론에 일정 정도 대응할 수 있지만, 더 좋은 방법은 위에서 비판으로 제시한 효과까지 실제로 모두 측정하여 검토하는 것이다. 즉 과연 공론조사 과정에 동조 효과나 전략적 영향력 행사 효과가 개입하는지 확인해보고, 실제로 그런 의도하지 않은 효과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과 별도로 학습과 설득에 의한 여론 변화가 실체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주면 된다. 공공자문을 빙자한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공론조사를 수행해서 여론을 유도하거나 조작하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공공자문을 하겠다면서 잘못된 공론조사를 수행함으로써 민주적 정책 관리를 반대하는 자에게 비판의 여지를 주는 것도 문제다.

기자명 이준웅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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