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해외연대 제공지난해 해외에서도 촛불이 켜졌다.
한 해외 교민은 “박근혜 정부 적폐가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을 깨웠다”라고 말했다.

1년 전, 서울 광화문광장 말고도 세계 곳곳에서 촛불이 켜졌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재외동포 행동’에 따르면 국내에서 첫 촛불집회가 열린 10월29일 이후 한 달간 26개국 70개 도시에서 교민들이 모였다. 5개 대륙에 걸쳐 있었다. 지구 반대편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여름이었다. 

집회 경험이 없는 이들도 온라인으로 모임을 제안했다. 혼자 무작정 피켓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이도 있다. 한 가족에서 600여 명까지, 숫자도 제각각이고 연령도 직업도 다양했다. 촛불을 드는 게 한국에서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인근에 집회를 여는 데가 없어서 다섯 시간 동안 운전을 하거나 기차를 타고 가서 합류한 경우도 있었다. 애써 찾은 만큼 열기도 뜨거웠지만 교민들 일부가 난데없이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거기도 ‘태극기 부대’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 규명을 위한 연대 활동을 이어온 재외동포들의 풀뿌리 네트워크 ‘4·16 해외연대’가 구심점이 되었다. 온라인으로 일을 도모하고 SNS로 소통했다. 각기 다른 도시에 사는 교민 13명에게 1년 전 촛불의 기억과 촛불이 바꾼 것을 물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북부 혼스비에서 한국식품점을 운영하는 김현정씨(44)는 지난해 난생처음 집회에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 때부터 시작된 국가에 대한 의구심이 박근혜 게이트를 계기로 극에 달했다. 저녁마다 진실이 무엇인지 남편과 토론했다. 마침 교민 신문에 집회 소식이 떴다. 일주일치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가게가 가장 바쁜 토요일에 열리는 집회였다. 김씨는 남편에게 말했다. “안 가면 너무 부끄럽고 애들 보기 민망할 것 같아. 지금 어떻게 안 하면 세월호 진상 규명도 안 될 것 같고.” 쌍둥이 아들은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다.

42℃의 무더운 날씨, 기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 시드니 하이드파크 앞에 도착하니 6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혼자라 쭈뼛쭈뼛했지만 동네 이웃들의 얼굴이 보였다. 함께 큰 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집에 돌아올 땐 가슴이 벅찼다. 다음 집회를 앞두고 김씨는 용기를 내 혼스비 주민들에게 같이 가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초등학교 교사로 32년째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남미숙씨(47)는 한 국가의 대통령이 어떻게 한 사람 손에 놀아날 수 있을까 분노했다. 그건 박 전 대통령이 무능함을 넘어 최순실씨와 공범이라는 걸 의미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었다. 한인이 드문드문 살고 있는 지역이라 사람들 모으는 게 어려웠다. 한국식품점 앞에서 진행한 첫 번째 시위 당시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200여 명이 모였다. 힘들게 모인 만큼 열기가 대단했다.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집회에도 한인 40여 명과 캐나다 현지인들이 참여했다. 발언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공유하고, 박 전 대통령이 오타와 방문 당시 머물렀던 호텔까지 행진했다. 집회에 참석했던 김경희씨(46)에 따르면 오타와는 캐나다의 다른 지역과 달리 대학이나 정부 기관에 종사하는 이민자가 많다. 캐나다 사회에 안착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는 이들이다. 그는 “한인들도 한국 대사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 정책에 반하는 시위나 집회를 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의 참담한 거짓말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었다”라고 말했다.

집회를 주최해본 경험이 없는 이들도 총대를 멨다. 이탈리아 로마에 거주하는 박종대씨(50)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1987년 이후 오랜만에 거리로 나섰다. 21년 전 이탈리아에 온 그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관심을 끊었다. 하지만 탄핵 정국 당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나는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난 여기서 뭘 해야 할까.’ 두 시간 뒤 로마에 사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도 뭔가 할까요?” 모두 경험이 없었다. 집회를 준비 중인 파리 지역 교민에게 페이스북으로 도움을 청했다. 모르는 사이였지만 진행 순서를 공유하는 등 선뜻 도움을 주었다. 지난해 11월19일 로마 시청 앞 베니스 광장에서 첫 집회를 열었다. 30명 정도 모이리라 예상했는데 150명 넘게 왔다. 로마 한인 사회에서 그런 성격의 모임은 처음이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는 교민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해외 동포들은 304명의 죽음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국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국내 정세에 관심이 없던 이들을 달라지게 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켈리 리씨(46)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회사에서 처음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들었다. 캐나다 동료가 한국에서 배가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당시엔 구출할 거라며 가볍게 넘겼는데 아니었다. 자식을 그리워하며 우는 단원고 희생자 아빠의 영상을 보고 출근길에 펑펑 울었다. 젊은 시절 유학 와서 힘든 시기를 지나고 40대 중반인 리씨는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즐기며 살 수 있을까 집중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내가 행복한 게 사회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구나. 내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다른 아이들도 행복해야 하는구나’ 깨달았다. 그는 “세월호 참사 때 내 나라가 이렇구나 싶어 암담했는데 국정 농단 당시엔 창피해서 얘길 못 꺼냈다. 동료들이 비아그라에 대해 물을 때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리씨는 네 차례 촛불집회 중 최다 인원(500여 명)이 모인 11월12일 사회를 봤다. 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나이애가라나 윈저에 살고 있는 교민들도 먼 길을 달려왔다.

일본 도쿄에 사는 임효정씨(32)는 2014년 4월16일 임신 중이었다. 입덧을 할 때였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는 정부가 원망스러웠다. ‘한국에 살고 있는 국민도 지키지 못하는 나라가 해외에서 사는 우리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졌다. 함께 활동하던 지인들과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신주쿠역 앞에 모였다. 대부분 엄마들이라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난 후 점심 시간을 활용했다. 추운 날 유모차를 끌고 손에 피켓을 든 30여 명이 모였다. 일본에 사는 한인들이 냉소적이고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아이 둘을 기르는 정주호씨(46)의 삶도 세월호 참사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9·11 테러 당시 소방대원들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면서도 올라갔다. “인근 소방서 전원이 죽고 그들의 이름만 남겨져 있다. 그 정도 사고면 해경이 어떻게든 손을 썼어야 한다. 한국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더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와 내내 울었고 밤잠 못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좀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면서 다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갔다. 밤새워 한국 뉴스를 보느라 시력도 나빠졌다.

이렇듯 교민들은 공통으로 세월호 참사가 남긴 강렬한 경험을 고백했다. 김경희씨는 “캐나다에 산 지 20년이 조금 넘었지만, 교민들이 한국 상황을 우려해 한자리에 모여 시위한다는 얘길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적폐와 세월호 참사가 한국에 있는 국민뿐만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 역시 깨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 이후 해외 곳곳에서 추모 집회가 열렸다. 지역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모임이 만들어져 유족을 초청하고, 진상 규명 촉구 서명을 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런 경험이 탄핵 정국, 빠른 결집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사는 권오달씨(48)에게는 작년의 촛불집회가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집회 참가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이후 25년 만이었다. 복합적인 계기가 있었다. 권씨는 “개인적으로 학생운동 이후의 오랜 침묵, 세월호에 대한 비인간적인 폭력, 한국 촛불의 거대한 물결, 이방인으로서 소속감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섞여 있었다”라고 말했다. 교민과 현지인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한인 마트를 비롯해 유명 관광지를 장소로 정했다. 겨울이라 오후 5시부터 어둠이 찾아왔다. 집회 인원이 한국처럼 물결을 이룬 게 아니어서 더 추웠다.

나라별로 집회 풍경과 절차가 달랐다. 런던은 퍼포먼스 위주였다. 한국처럼 구호를 외치는 데 익숙지 않아 피케팅을 하거나 전단지를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 광장에 500여 명이 모여 행진할 때는 경찰이 시내 교통신호를 막아주었다. 촛불시위를 주관했던 한독단체 코리아협의회 한정화 대표도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건 처음 보았다. 한 대표는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해외에서의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역시 하루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다. 동포 사회 저변에는 위안부 할머니 문제 등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Tsukasa Yajima2014년 10월18일 ‘세월호를 기억하는 베를린 행동’은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에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신발 304켤레를 놓고 진혼제를 올렸다.

최순실 모녀가 머물렀다고 알려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현지인들의 관심이 컸다. 집회는 독일 최초의 시민의회가 열린 장크트파울 교회 앞에서 열렸다. 40여 년 전 인혁당 사건이 있을 때 항의 집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DFT 프랑크푸르트 한인 모임’이 만들어졌다. 집회 신고를 할 때 주최 단체 이름을 적어내야 해서 고심하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로 이름을 만들었다. ‘민주(Demokratie)’ ‘평화(Frieden)’ ‘투명(Transparenz)’의 약자를 땄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 등 과거부터 이어진 몇몇 사건으로 지역 교민의 사회활동이 위축되었는데, 작년 촛불집회는 평소 정치적인 일에 소극적이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국내와의 공통점은 다양한 세대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리옹 공화국광장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 11월 두 차례 집회가 열리는 동안 40대 직장인, 30대 웹툰 만화가, 젊은 연구원 등 참석자가 다채로웠다. 연극을 전공한 유학생이 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른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국에서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서글픔에 대해 말하다 눈물을 보였다. 법학을 전공하는 유학생은, 이참에 우리의 삶 속에서 민주주의적 태도가 결여되지 않았는지 성찰해보자고 했다. 집회에 참석했던 곽정환씨(39)는 “그동안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데 익숙하지 않던 젊은 층이 자신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질문하고 자기 목소리로 발화할 수 있는 공론장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김흥구‘4·16 해외연대’ 활동가들이 세월호를 주제로 손수 만든 배너를 모은 〈4·16 해외시민 배너 외침전〉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1월23일까지 열린다.

지역에 따라 규모도 제각각이었다. 한 가족에서 시작된 촛불도 있었다. 캐나다 빅토리아에 사는 김세리씨(38)는 한국에서 촛불집회가 시작되는 걸 보고 바로 다음 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3~5시 대표적인 관광지 이너하버에서 피켓을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스케치북으로 만든 피켓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부끄럽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자랑스럽다’라고 적혀 있었다. 촛불과 스케치북을 들고 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나란히 섰다. “제발 한국 관광객 한 명이라도 만나자는 심정이었다. 촛불 하나에서 둘이 되던 순간 가장 기뻤다.” 이민 온 지 40년 된 어른이 탄핵 심판 때까지 함께 촛불을 들어주었다. 

시위가 평화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보수적인 교민 사회의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미국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 집회 당시 참가자들에게 ‘북한에나 가서 살아 빨갱이들아’ 따위의 말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남미숙씨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박근혜 탄핵을 얘기하는데 ‘종북’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필라델피아에서도 대다수 교민들 반응이 차가웠다. 특히 60대 이상 노인들이 큰 소리로 욕하고 침을 뱉기도 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대통령은 부끄럽지만 국민은 자랑스럽다”

이제 해외에서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역시 국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갔다. 촛불 이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김현정씨는 드라마를 안 보게 됐다. 챙겨 볼 뉴스가 너무 많아서다. “옛날엔 장사하는 사람은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옳은 일에는 중립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가게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서명을 받았다. 장사나 똑바로 하라며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오기가 생겼다. 최근에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세월호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대비 김씨(43)는 “뭔가 변화가 있어야 이걸 놓고 다른 걸로 옮아갈 텐데 한국 사회가 그럴 수 없게 만든다. 정부가 달라졌지만 바뀐 게 많지 않다. 감시인 노릇을 그만두면 안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얻은 것은 든든한 이웃이다. 정주호씨는 다양한 사회 이슈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얻었다. 그는 얼마 전 미국 영주권을 연장했다. 시민권을 신청할 자격이 되었지만 재외국민 투표를 하기 위해서였다. 점으로 흩어져 있던 개인이 한데 모여 목소리를 낸 경험 자체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독일 뮌헨에 사는 신규하씨(36)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집회에 참석했는데 함께 모여 눈물 흘리고 구호를 외치며 많은 위안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요즘 그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뮌헨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통해 헌법 개정, 투표제 등 다양한 주제를 공부하고 있다.

교민들이 속한 사회의 한국에 대한 시각도 일부지만 조금 달라졌다. 김경희씨는 한인으로서 요즘처럼 어깨를 펴고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 하면 미사일 쏘는 북한에서 온 사람 취급하거나 케이팝, 한국 드라마에 관한 얘기만 물어보던 현지인들도 촛불혁명으로 부정한 정권을 바꾼 위대한 국민들에 대한 얘기를 한다.” 뮌헨에서 집회를 열 당시 현지 언론사가 취재를 나왔다. 질서 정연했던 한국의 대규모 촛불집회에도 관심을 보였다. 신규하씨는 “국가적으로 큰 망신을 일으킨 사건이 수준 높은 시민의식의 재발견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해외 동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10월26일 12개국 45개 도시에 흩어져 있던 ‘4·16 해외연대’ 활동가들 일부가 서울에서 모였다. 온라인으로 긴밀히 연대해온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모이기는 처음이었다. ‘4·16 해외연대 서울포럼’에 참가한 이들은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이 가운데 수전 리, 이제이 김, 김효정씨가 세월호를 주제로 손수 만든 배너가 광화문광장에 걸렸다. 45개 도시를 돌고 온 배너다. 활동가들은 안산 단원고와 목포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해외 교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촛불을 이어가고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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