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2월2일, 요즘은 세종문화회관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에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단다. MBC 개국 11주년을 기념하는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렸기 때문이지. 문제가 터진 건 환호와 박수 속에 가요 청백전이 마무리된 직후인 저녁 8시30분경. 별안간 조명 장치가 펑 하고 터지면서 불꽃이 튄 거야. 곳곳에 튄 불꽃이 불길로 번졌고 당황한 주최 측이 막을 내리자 그 막으로 불이 옮아붙으면서 큰불로 비화됐지. 그 사고로 50명이 넘게 사망할 정도로 대화재였어.

서울시내 소방차는 물론이고 미군 소방차까지 총출동하여 화재를 진압하는 가운데 시민들의 눈에 안타까운 광경이 포착됐다.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하는 여자 아이가 4층 회전 창틀에 허벅지가 낀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던 거야. 이 모습은 가요 청백전 취재를 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탈출한 〈한국일보〉 박태홍 기자의 카메라에 담겼지. 울부짖는 사람들 머리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어린 소녀. 기자는 셔터를 누르면서도 외쳤어. “저 애를 살려주세요. 빨리!” 소방관들도 사태를 알아채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장에 나온 소방관들은 바로 1년 전 1971년 12월25일 163명의 사망자를 낸 대연각호텔의 악몽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지. 고층 빌딩이었던 대연각호텔은 고가사다리차조차 닿지 않는 곳이 많아 사람들이 불길을 피해 몸을 던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봐야 했지만 그에 비하면 시민회관은 넉넉히 사다리가 닿을 만했어. 소방관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고가사다리차를 갖다 대!”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건물 벽에 바짝 차를 접근시켜야 했는데 건물 벽 앞의 화단이 장애물이 된 거야. 세 번 네 번… 열 번 소방관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가운데 고가사다리차는 몇 번을 전진, 후진을 왕복하며 필사적으로 벽에 붙어 서보려고 기를 썼지. 마침내 화단 장애물을 넘어 사다리차가 건물 벽에 바싹 달라붙는 데 성공했어. 환호할 사이도 없이 소방관이 사다리 바스켓에 올라탔다. 이영주 소방관이었어.

ⓒ한국일보1972년 서울시민회관 화재 모습.
창틀에 다리가 낀 채 매달린 소녀를 소방관이 구출하고 있다.

“고가사다리차를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건물 벽에 바짝 접근시켰다. 나는 사다리 바스켓에 올라타 소녀가 떨어질지 모를 위치에 바싹 붙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소녀는 내 발등에 떨어졌고 그 순간 함께 떨어져 내린 소나기 유리 파편과 쇠 창틀을 겨우 몸으로 막아냈다.”

그날의 화재로 인연을 맺은 소방관과 소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해. “가정형편상 상고에 진학한 조수아(소녀의 이름)양에게 대학 진학을 권하기도 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조양에게 소방관이 되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는 등 인생의 후원자 노릇을 했고(〈경향신문〉 1991년 4월9일자)”, 마침내 그녀가 결혼할 때는 제2의 아버지 자격으로 주례석에 섰다니 대단한 인연이겠지. 그 경사스러운 결혼식 날 이영주 소방관은 또 한 사람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어. 그날 자신과 함께 소녀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친 사람, 화단을 밀어붙이고 타고 넘으며 필사적으로 사다리차를 벽에 붙였던 고기종 소방관이었어.



화재 현장에서 순직해도 국립묘지에 못 묻혀

고기종 소방관과 이영주 소방관은 1967년 종로소방서에서 소방관으로 함께 첫발을 디뎠지. 당시만 해도 성냥으로 불을 켜고 모닥불에 몸 녹이던 시절이고 전기 설비도 엉망이었을 때라 대형 화재가 잦았다. 앞서 얘기한 서울시민회관 화재와 대연각호텔 화재, 더하여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는 1970년대 3대 화재라 일컬어지거니와 그 외에도 수시로 큰불이 터졌어. 고기종 소방관과 이영주 소방관은 서울 곳곳에서 발생한 모든 화마와 맞서 싸운 사람들이었지. 시민회관 화재 때 고기종 소방관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화단을 넘어서 건물의 벽에 고가사다리차를 바짝 붙인 순간 수십명이 살아날 길이 열렸고, 이영주 소방관이 찢어져라 뻗은 손이 죽음 앞에 내몰린 수십명의 영혼을 건졌단다.

고기종 소방관의 별명은 ‘도끼’였다고 해. 도끼로 잘라내듯 일 처리를 확실하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지. ‘제트기’라고도 불렸다고 해. 화재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갔기 때문이지. 그러다 보니 바보 같다는 말도 들었다지. 소방관도 직업이고 일단 자기 몸 챙길 깜냥은 부려야 하는데 너무 우직하게 불 속으로 뛰어들고 남의 목숨에 자기 목숨을 걸곤 했으니까.

1990년 9월19일 서울 중구 의주로2가 녹지대 안에 있던 한전 건물 자재창고 화재 현장에서도 그랬다. 23년9개월 동안 7000번 출동을 해온 그에게 창고 화재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그는 ‘제트기’처럼 달려들어 40분 만에 불을 껐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어. 그는 “불을 완전히 잡은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도끼’ 고기종이었거든. 어둠 속에서 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지하실을 더듬던 그는 그만 맨홀 구멍에 빠지면서 11m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어. 수백명의 목숨을 구해온 베테랑 소방관의 최후였지.  

ⓒ연합뉴스2001년 서울 홍제동 화재로 순직한 소방관 6명을 기리는 추모 동판 앞에 유족이 헌화하고 있다.
며칠 뒤인 9월22일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이 장렬한 죽음에 부치는 통렬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명문이라 생각해서 일부를 적어 옮겨두마. “바로 이런 분들 덕분으로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고씨의 죽음 앞에서 부끄럽다. 이런 무명민초의 착하고 끈질긴 노력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한 채 호사를 즐기고 누리지 않았을까. 열악한 근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진즉 결딴나고 부서지고 깨어졌을 것이다.” 23년이 넘는 경력의 고기종 소방관이었지만 그는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어. 1995년 개정 이전까지 국립묘지령 제3조 6항은 안장 대상을 ‘군인·군무원·경찰관’으로 한정했고,  그 외의 경우엔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야. 수십 년간 국립묘지 매장 문제는 많은 소방관들의 여망이자 한(恨)이었다.

2001년 3월 서울 홍제동 주택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불길에 휩싸인 집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방관 6명이 뛰어 들어갔는데 낡은 주택이 무너져서 그 모두가 목숨을 잃었지. 취재차 찾아간 그들의 빈소에서 만난 한 소방관이 울먹이는 걸 들었어. “바보들입니다. 자기 목숨도 못 구하면서. 누굴 구조해요.” 한참을 울던 그가 신발 끈을 매는 걸 보고 문득 어디 가십니까 하며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어. “근무 갑니다. 비번인데… 빠진 자리가 많잖아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빠 역시 눈물을 쏟고 말았단다. 서부소방서에 가면 그날 죽어간 여섯 분의 동판이 걸려 있어. 그 동판은 나라에서 만든 게 아니야. “유가족들이 보상금으로 받은 돈 중 1500만원을 모아 제작했다.” 어떤 나라가 영웅들을 기념하는 일마저 가족들에게 맡기고 그 보상금으로 해결한단 말이냐. 이런 나라에서도 어떤 이들은 몸 던져 불길과 싸우고 남의 목숨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하자꾸나. 다시 한번 복창하되 “바로 이런 분들 덕분으로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는 것”이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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