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온통 새까맣다. 한가운데 세로로 길고 좁은 틈이 하나 나 있을 뿐이다.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사내아이가 그 틈으로 얼굴과 한쪽 팔만 슬쩍 내보이고 있다. 제목이고 뭐고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책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돌려보니 가까스로 읽을 만한 글자가 잡힌다. 하이드와 나, HydE&SeEK, JIMIN KIM. 제목 그대로 ‘하이드와 나’가 벌이는 숨바꼭질이겠지?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모티프를 얻어 또 다른 자아를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를 펼쳤겠지? 영어와 한글을 같이 쓰고, 대문자와 소문자를 뒤섞은 것도 이런 의도를 담은 전략이겠지? 책을 읽기 전, 혹은 읽고 나서 이런 추론과 정리를 할 수 있다.

〈하이드와 나〉 김지민 지음, 한솔수북 펴냄

그렇다. 이 책의 주제를 말하자면 딱 그 정도다. 글 텍스트도 그 주제를 싣고 간다. 풍기는 분위기로 보자면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서 낯선 대문 집을 발견한다. 열린 대문 틈으로 내다보는 얼굴은, 바로 나다! 놀라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간 아이는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너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우리는 둘이기도 하고 셋이기도 하고 더 많기도 해. 넌 나의 부서진 조각… 달의 뒷면… 가지 않은 길…. 설명적이기도 하고 상징적이기도 한 글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아니, 이 글은 이해가 목표가 아니다. 느낌이 목표다. 너에게 말을 걸어오는 또 다른 너를 떠올려봐라. 무엇이 느껴지는가.

이제 그림 텍스트가 더 넓게 펼쳐 보이는 그 ‘느낌’을 찬찬히 따라가본다. 그림은 흑백 톤이지만, 무서울 정도로 입체적이다. 각기 다른 채도의 검정과 흰색이 어지러운 듯 정연하게 짜인 무늬들 덕분이다. 아코디언 모양으로 종이를 접은 책의 만듦새 덕분이기도 하고, 페이지마다 절묘하고 기묘하게 뚫린 ‘창문’ 덕분이기도 하다. 그런 장치들이 한 인물만 등장하는 무채색 그림에 층층의 깊이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깊이 속에서 가장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이의 얼굴이다. 잘린 얼굴들, 뒤틀린 얼굴들. 무서워 보인다. 이 작가는 독자에게 너의 조각과 또 다른 너를 찾아라, 그것들은 날카롭게 잘리고 고통스럽게 뒤틀려 있어서 무섭겠지만, 그래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그런 것 같다. 작가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는 아코디언 페이지의 뒷면을 보아야 한다. 흑백으로 어지러운 듯한 앞면과 달리 뒤쪽은 온통 하얀 배경에 창문 속으로 아이의 모습이 얼핏얼핏 보인다. 훨씬 마음이 안정된다. 시작 페이지에서 대문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던 아이가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의 하얀 목덜미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안쓰러우면서도 믿음직하다. 시작과 끝은 이렇게 견고한 대칭을 이루고, 그 사이는 어지러우면서도 안정적이다. 글 텍스트는 아이가 자신의 수많은 자아와 함께 세상의 모호함을 시적으로 끌어안고 성장함을 보여준다. 과감하고 독창적인 형식과 함께 이 책에 보기 드문 예술성을 부여하는 요소다. 영국 ‘AOI 월드 일러스트레이션 어워드 2016’의 도서부문 신인상과 뉴탤런트 대상, 나미 국제콩쿠르의 퍼플아일랜드 상, BIB의 황금사과상 같은 세계적 상을 잇달아 받았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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