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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2017년 11월 14일(화) 제530호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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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현지 분위기는 뜨겁지 않지만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1월7일은 20세기 인류 역사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11월7일은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의 날짜이고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25일이어서 10월혁명이라 불린다). 1917년 11월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노동자 군대가 러시아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 궁전을 점령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러시아혁명은 러시아를 넘어 20세기 내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소련 체제는 74년 만인 1991년 해체됐다. 사실상 좌초한 혁명으로 귀결된 셈이지만 인류 역사에는 여전히 큰 명암을 드리우고 있다. 지금도 중국·쿠바·베트남·라오스 등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헌법 강령으로 못 박고 있다.

러시아 출신 귀화인 박노자 교수(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최근 <러시아혁명사 강의>를 펴냈다. 혁명 주역 레닌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혁명 이후 시대를 살아온 박 교수의 생생한 목격담과 경험담이 녹아 있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동아시아와 한국학을 강의하는 박 교수는 10월14일 중앙대학교에서 열린 ‘러시아혁명 100주년 학술대회’ 참석차 귀국했다.


ⓒ시사IN 윤무영
박노자 오슬로 대학 교수는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러시아혁명을 기점으로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자는 ‘복벽파’가 쇠퇴하고 러시아혁명처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민중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혁명사 강의>를 펴낸 계기는?


한국에서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지나가버릴 거 같아 우려했다. 한국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러시아혁명사를 강의했는데, 출판사에서 책으로 묶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러시아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교사이자 반면교사니까.

연구자로서 러시아혁명의 당초 목표는 무엇이었고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나?


레닌이 말한 볼셰비키 혁명의 목표는 인류의 새로운 역사, 즉 모든 인간이 계급 차별 없이 평등한 주체로 사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그런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지 못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지 못한 이유는?


혁명의 주체가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 성공 직후 상황 논리를 내세워 중앙집중식 통제 국가를 만들어버렸다. 스탈린 체제로 넘어가면서 통제는 더 강화되었다. 당초 혁명이 내세운 민주성은 퇴보했다. 그럼에도 러시아혁명으로 인류가 새로운 ‘발견’을 한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새로운 발견?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러시아혁명은 시장 자본주의나 대(對)서방 종속이 아닌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자주적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인류 역사의 새로운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혁명 당시 러시아도 크게 보면 제3세계 일부분으로 주변부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러시아는 혁명 이후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1930년대 소련의 급속한 자주적 근대화 노선을 1950~ 1960년대 중국·북한·인도 같은 나라들이 벤치마킹했다.

ⓒTASS
1919년 5월25일 붉은광장에서 적군 병사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레닌.
러시아혁명이 남긴 교훈이 또 있다면?


민중운동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확보되지 않으면 거창한 명분을 내걸어도 결국은 또 하나의 권위주의 체제가 된다는 점이다.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확보되지 못했고, 그나마 있던 민주적 요소들도 축소됐다. 사실 러시아혁명으로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가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권위주의 체제는 자기 파탄의 씨앗을 갖고 있었던 거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혁명 실패가 남긴 인류사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들어가보자. 러시아혁명이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혁명을 기점으로 연해주, 시베리아 등에 조선인 항일 유격대가 결성되었다. 이 유격대 활동을 계기로 만주 유격대가 결성되었고, 그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이 해방 이후 북한을 세웠다. 거시적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하는 데 러시아혁명이 영향을 미쳤다. 항일 독립운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근본적 변화란 어떤 의미인가?


1910년대 조선 독립운동은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자는 ‘복벽파’가 많았다. 중국 신해혁명을 모델로 한 ‘민국파’도 있었지만 민국파라도 일제에서 해방된 뒤 독립 공화국 정도만 생각했다. 구체적인 사회상이 없었다. 공화제만으로는 민중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독립 이후 공화제가 됐든 왕조 시대가 됐든 토지를 갖지 못한 민중은 어차피 힘들게 살며 착취당한다는 인식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성향 독립운동 세력도 독립이 되면 러시아혁명처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에 민중들이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파 독립운동도 러시아혁명에서 영향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나라를 되찾게 되면 주요 공업시설을 국유화하고 무상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러시아혁명이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자극을 주고 급진화시킨 결과다. 20세기 내내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과 조선에서 일어나는 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혁명사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직결된다.

당시 구체적으로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받은 사례를 든다면?


친일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윤치호와 여운형의 행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윤치호는 조선사절단으로 러시아혁명 직전 니콜라스 2세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 경험 때문에 러시아혁명이 윤치호의 보수화에 상당히 영향을 준 거 같다. 윤치호는 원래부터 보수적이었지만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자기와 같은 귀족과 대주주들은 땅을 빼앗기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걸 보고 친일 활동으로 좀 더 적극 돌아선 것이다.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해 트로츠키 연설을 듣고 <모스크바의 인상>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러시아혁명은 여운형의 독립운동 방향에 영향을 미쳐 그는 1930년대 사회민주주의자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혁명에 조선인도 기여했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일본은 극동 러시아에 군대 10만명 정도를 출병시켰다. 일제 식민 지배를 피해 당시 수많은 반일·항일 고려인(옛 소련 이주 조선인)이 만주와 연해주에 살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유격대 중에서 고려인이 5000명 정도 됐다. 이들은 러시아혁명을 도우면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항일 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됐나?


일본군은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을 몰살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1920년 ‘니항 사건’이 터졌다. 니항은 니콜라예프스크 시를 말하는데 소련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부 고려인 아나키스트들이 항복한 일본군과 거류 일본인 수백명을 학살했다.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고려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보복으로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고려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혁명 이후 스탈린 체제에서도 고려인 강제이주 등 피의 학살과 인권유린이 극심했는데?

스탈린 체제에서 혁명이 보수화되고, 강력한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과정에서 볼셰비키 활동가들과 소수민족 활동가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70만명 가까운 사람이 극형을 당했다. 1937년에는 학살이 극에 달했는데 고려인을 포함해 소수민족에 속하는 이들 약 45만명이 희생당했다. 강력한 민족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소수민족과 활동가들이 국가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러시아 현지에서 혁명 100주년을 맞는 분위기는?

일부 언론과 학계에서 재조명하는 정도일 뿐 국가적으로 크게 기리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 이유가 재밌는데 푸틴 정권이 혁명을 민감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 여론조사 결과 볼셰비키 혁명이 좋은 의미였다고 보는 사람과 절대적으로 나쁜 일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각각 절반으로 나뉘었다. ‘만약에 당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1917년으로 간다면 어느 정당에 가입하겠느냐’는 질문에 46%는 볼셰비키라고 답한 반면 나머지 50%는 복벽당, 즉 왕정 복귀를 바라는 정당이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민심이 러시아혁명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으로 양분돼 있다. 푸틴 정권은 어느 쪽이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수 있어서 부담을 느끼고 있다.

러시아인은 스탈린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심하겠다?


아니다.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지지율이 60%를 넘는다. 레닌에 대한 지지율은 30~40%에 머문다. 러시아의 부국강병을 이룬 지도자로 스탈린을 보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미국이 가장 경계할 만큼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스탈린 체제에서는 업적주의와 실력주의로 인재를 등용해 재능이 있으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고, 인민의 복지제도가 비교적 잘 갖춰졌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에서 박정희 독재 향수와 비슷한 현상인가?

러시아인들의 스탈린 향수는 한국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노스탤지어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북한의 김일성 노스탤지어와도 겹치는 측면이 있다.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시절에는 나라를 위해서 일할 일꾼이라면 누구나 등용되고, 좋은 시절이었고, 다들 비슷하게 잘살았다고 평가하는 것과 비슷하다. 객관적 사실 여부를 떠나 재미있는 현상이다.

러시아 출신 한국학 학자로서 남북한 사이의 역사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북한은 민중사적 관점이 강하다. 예를 들어 한국은 수공업 역사 같은 것을 취급하지 않는데 북쪽에서는 조선 수공업 역사, 농업기술사, 건축사 이런 것을 아주 깊이 있게 다룬다. 또 한국에서 민란사라 부르는 민중 반란사에 대한 연구도 잘 축적되어 있다. 북한 교과서는 민란 관련 부분을 아주 크게 다룬다. 물론 객관적인 조명이라고 보긴 어렵다. 정권과 관련한 부분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연구자들도 정해진 도식에 따라 다뤄야 한다. 박근혜 정부 국정교과서도 비슷한데, 그나마 한국 학계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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