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과 만나는 자리, 짙은 눈썹에 선한 미소를 가진 어느 학생이 마음 상태를 글로 쓰면 50%밖에 표현이 안 된다며 글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특히 공감이나 소통이 서툰데, 자신이 이공계이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어서 문제 같다는 자체 진단도 덧붙였다. 글쎄다. 비단 전공의 문제일까 싶다. 지금의 20대는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게 생존에 유리하도록 길러진 세대다. 남에게서 고개를 돌려야 살아남도록 구조화된 경쟁 집단에서 평생을 자랐다. 글 좀 써보겠다고 해서 갑자기 감정이입이 될 리 만무하고, 무엇보다 그런 목적 자체가 공감에 최대 방해 요소다. 공감이나 소통은 타인에게 물드는 일이므로 토익 점수 올리기처럼 속성반이 없다. 도달할 목표나 보장된 성과가 없는 그 무용해 보이는 시간을 흘려보내며 자신도 떠나보내고 타인이 되어가는 지루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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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에게 공감 훈련을 위해 자신과 대화해보기를 권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라고 니체가 일갈했다시피, 가장 먼 타인인 자기 삶부터 들여다보고 자신과 소통을 시도하는 거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느낄 때 ‘왜?’라고 질문하고, 좋음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돈인지 관계인지 가치인지 정확하게 따지면서 글로 써보자고.

추상적인 다짐이 아닌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 복기해보면 자기감정과 생각·욕망의 여러 층위와 갈래가 보이고, 나라는 사람은 하나로 정리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존재임을 안다. 자기에 대해 섣불리 장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타인도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워진다. 조심스러워지는 일은 섬세해지는 일. 그렇게 내 판단을 내려놓고 남의 처지가 되어보는 게 공감의 시작이다.

언젠가 누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나는 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된 점이라고. 저마다 고유한 사정과 한계, 불가피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때 답하지 못한 게 더 있다. 글을 쓰면서 행복이나 희망이라는 붕 뜬 단어를 내 사전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던 점이다.

“행복이란 거의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노년에 자신의 생을 되돌아본 많은 위인들은 자신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합쳐보아야 채 하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180쪽).”

삶의 ‘행복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
 

〈길 위의 철학자〉 저자 에릭 호퍼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지, 불행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듯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충족은 또 얼마나 금세 냉소로 식어버리는가. 읽고 쓰고 듣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삶의 ‘행복 불가능성’을, 즉 그냥 살아감 자체를 받아들였다.

에릭 호퍼는 이런 통찰도 내놓는다. “우리는 일이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190쪽).” 일이 의미 있기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몰염치’라고 했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까지 덧붙이면서, 삶의 유일한 의미는 배움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에릭 호퍼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떠돌이 노동자 출신의 사상가다. 도스토옙스키나 몽테뉴의 저서를 거의 외울 정도로 읽었고, 글을 쓰면서는 “제대로 된 형용사를 찾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31쪽)”.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무모함,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부어댈 때 잠깐의 흘러넘침, 그것이 사유의 결과물로 손에 쥐여진다. 이 아름다운 낭비에 헌신할 때 우리는 읽고 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부디 그 이공계 학생이 한 번의 강좌, 몇 번의 시도로 글쓰기에 좌절하고 물러나지 않았으면 한다.

 

기자명 은유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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