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구글·트위터 등 미국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러시아 연계 세력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계정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여론 조작을 감행했다고 뒤늦게 시인했다. 지난 10월31일~11월1일 특검과 별도로 러시아의 대선 개입을 조사 중인 미국 연방의회가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에 출석한 거대 플랫폼 기업 중역들이 ‘자백’한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무풍지대에 놓였던 관련 업계에 대한 입법 규제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번 의회 청문회를 통해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실상이 드러났다. 페이스북에 따르면, 2015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러시아 정부 연관 업체인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는 페이스북에 470개 계정과 페이지를 운영하며 3000개 정도의 정치 광고를 집행했다. 당초 페이스북 측은 IRA의 정치 광고에 노출된 이용자 수를 1000만명 정도로 봤다. 청문회를 통해, IRA가 페이스북에 올린 자료 8만여 건이 ‘좋아요’와 댓글, 공유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1억2600만여 명에게 도달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예상의 10배다.

ⓒEPA미국 거대 플랫폼 기업 임원이 청문회에 출석했다. 왼쪽부터 션 에드깃 트위터 총괄고문 대행, 콜린 스트레치 페이스북 법무총괄고문, 켄트 워커 구글 선임부사장 겸 법률고문.

페이스북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구글과 트위터의 사정도 만만치 않다. 트위터 측은 2016년 9~11월, 미국 대선 투표일까지 석 달 동안 개설된 IRA 관련 계정이 2700여 개라고 밝혔다. 지난 9월까지만 해도 트위터 측이 밝힌 IRA 관련 계정은 201개에 불과했다. 구글 역시 2015년부터 올여름까지 IRA가 자사의 유튜브 18개 영어 채널에 광고를 구매했고, 총 43시간 분량에 비디오 1100개를 올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측이 미국 인터넷 유저들을 상대로 벌인 일은, 한국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이 했던 댓글 공작과 유사하다. 한국에서와 똑같이 특정 후보(트럼프)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만 미국에서는 이런 공작으로 혜택을 본 공화당마저 여론 조작에 분개하고 추궁한다는 점에서 한국과 크게 다르다.

청문회에서 집중 포화를 당한 업체는 IRA의 주된 공략 대상이었던 페이스북이다. 민주당의 크리스 쿤 상원의원은 “페이스북 측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책임 있게 행동하기까지 11개월이나 걸린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따졌다. 공화당의 리처드 버 상원 정보위원장은 “적성국 요원들이 미국인의 여론을 다방면에서 교묘하게 조작해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라며 적시에 대응하지 못한 점을 질타했다. 민주당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은 “이런 플랫폼을 만든 것이 당신들인 만큼 책임도 져야 한다”라고 몰아붙였다.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이번 청문회 개최 시기에 맞춰 나름의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페이스북은 내년 말까지 보안 담당 직원을 지금보다 2배 늘려 2만명으로 증원하기로 했다. 또한 광고주의 신원을 공개하는 한편 광고 판매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나아가 트위터·구글 등 다른 기업들과 협력해 ‘위장 광고(일반 게시물로 위장한 광고)’에 대한 단속도 강화할 계획이다. 구글 또한 정치 광고 관련 기록(광고주와 광고 가격)을 적시한 연례 보고서를 발간하겠다고 밝혔다. 트위터는 IRA 관련 계정들을 폐쇄하는 한편 러시아 정부 선전 매체들의 광고를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대책들은 일종의 ‘자율규제’ 방침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별로 민간 차원의 대책을 수립·시행하니 정부 차원의 개입은 삼가달라는 의미다. 하지만 일부 의원들은 강력한 입법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미 상원에서는 초당적으로 ‘정직한 광고법’을 발의한 상태다. 이 법안 공동 발의자 중 한 사람은 존 매케인 의원이다. 공화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시민들 사이에서도 신뢰도 높은 매케인 의원이 입법 규제안을 냈다는 사실 자체가 SNS 규제의 사회적 정당성을 강화해주었다. 매케인 의원은 2002년에도 인쇄 매체 및 지상파 방송의 정치 광고에 대한 규제 법안 통과에 결정적 기여를 한 바 있다. 공동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민주당 마크 워너 상원의원은 최근 공영 라디오 방송 NPR에 출연해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청문회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라며 앞으로 SNS 규제 입법을 지지하는 공화당 의원 수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러 정부 게시물 8만 건, 1억2600만명에 도달

정직한 광고법은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 업체가 500달러 이상의 정치 광고를 내보내면 그 내역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게 핵심 골자이다. 광고 자료의 디지털 사본도 보관하고 광고 게재 일시까지 기록해놓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해당 정치 광고의 주인이 외국인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합리적 노력’도 해야 한다.

거대 플랫폼 기업은 이 같은 의회 측의 입법 규제 움직임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내심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 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이 출석한 거대 플랫폼 기업 중역들에게 법안 찬성 의사를 물었다. 단 한 명도 지지하지 않았다. 이들 기업은 의회를 향한 ‘물량공세’도 펴고 있다. 페이스북은 입법 규제 움직임이 본격화된 지난 3개월(7~9월) 동안 법안 발의를 막기 위한 로비에 290만 달러를 썼다.

해당 법안이 상·하원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 실제로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 법적 규제보다 자율 규제를 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게다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정치권과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이 실로 만만치 않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선거 고문을 지낸 마크 엘리아스 변호사가 이들 업계를 돕기 위해 적극 나섰다. 엘리아스는 정치 전문 법률사무소로 정평 높은 퍼킨스 코이 로펌의 회장이기도 하다.

대다수 정치 분석가들은 해당 법안이 통과된다 해도 러시아 혹은 다른 외국 세력의 미국 선거 개입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트위터에 뿔난 워너 의원


페이스북·구글·트위터 등의 최고 경영진이 의원들 가운데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굴까? ‘정직한 광고법’의 공동 발의자 중 한 사람인 마크 워너 민주당 상원의원(62)이다. 이 업체들은, IT 업계 출신이자 친기업 성향인 워너 의원이 자신들을 향해 규제의 칼을 겨누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버드 법대 출신으로 재선인 워너 의원은 정계 입문 이전인 1990년대 초부터 IT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IT 업체 넥스텔, 벤처 투자회사 컬럼비아캐피털 등을 창업하면서 2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모았다. 이후 버지니아 주지사를 거쳐 상원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미국 의회에서 IT 사업가들과 가장 친숙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인터넷 서비스 업체 AOL 창업자 스티브 케이스와 정기적으로 만나 기술 관련 정책 조언을 받는다.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건에 대해 지나치게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워너 의원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는 이번 청문회 한 달 전에 자신의 사무실에서 트위터 측 인사들과 비공개 미팅을 했다가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위터 측이 이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워너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정직한 광고법’ 발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난 대선 당시 러시아는 미국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면서 짭짤한 재미를 본 듯하다. 적어도 2018년 상·하원 선거에서는 러시아의 망동을 저지해야 한다.”

ⓒEPA‘정직한 광고법’의 공동 발의자인 민주당 상원의원 마크 워너(오른쪽)와 에이미 클로버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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