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올 것이 왔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흉흉하게 떠돌던 ‘망 중립성(net neutrality) 폐지’가 결국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친공화당 성향인 아짓 파이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은 지난 11월21일, “정부의 강압적인 규제를 철폐해 인터넷이 번성했던 2015년 이전의 가벼운 규제로 되돌리겠다”라고 천명했다. 사실상 망 중립성을 폐지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는 12월14일 FCC 회의에서 관련 안건을 표결에 부칠 계획이다. 현재 FCC 5명 위원 가운데 공화당 성향이 파이 위원장을 포함한 3명, 민주당 성향 위원이 2명임을 감안할 때 통과가 확실해 보인다.

망 중립성이란, ‘인터넷 통신망 제공업체가 데이터의 내용과 양에 따라 속도 및 사용료 측면에서 소비자들을 차별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예컨대 통신망 제공업체는 페이스북 등 SNS 사용이 크게 늘어나는 경우 SNS에 사용되는 데이터의 값을 올리는 식의 가격 정책으로 이윤을 증가시킬 수 있다. 혹은 데이터 전송 속도를 차별화한 상품으로 이익을 낼 수도 있다. 인터넷 통신망 사업자들이 영리 추구에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이 바로 ‘망 중립성’ 원칙이다. 민주당 오바마 정부가 2015년 3월 채택해 그동안 전폭적 지지를 받아왔다. 다만 인터넷 통신망을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용해야 할 ‘공적 자산’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관련 사업자들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오바마 행정부의 방침이 전자라면, 트럼프 행정부는 후자를 지지한다.

ⓒReuter11월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망 중립성 폐지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파이 위원장이 이번에 내놓은 망 중립성 폐지의 골자는 인터넷 통신망을 종전의 ‘공공 서비스’가 아닌 ‘정보 서비스’로 되돌려 시장의 원칙에 따라 작동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컴캐스트나 버라이존 같은 인터넷 통신망 제공자는 특정 인터넷 트래픽을 우대하고 다른 콘텐츠 업자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등의 방법으로 추가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

망 중립성 폐지에 공을 들여온 컴캐스트, AT&T, 버라이존 등 미국의 대표적 통신업체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사업자들은 인터넷 통신망 역시 자신들이 투자해서 내놓은 상품인데 그 가격이 마치 공공요금처럼 규제되는 바람에 재산권을 침탈당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해왔다. 이로 인해 투자 의욕이 감소되면서 소비자들에게 질 낮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통신업체들이 제공하는 인터넷 망에 의존해 급성장해온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넷플릭스 등 대형 플랫폼 업체들과 200여 개 IT 기업은 망 중립성 폐지 발표 직후, FCC에 재고를 강력히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대다수 주요 언론도 망 중립성 폐지가 인터넷 자유의 폐지에 버금간다며 연일 비판 논조를 이어가고 있다. 일반 누리꾼들 역시 ‘망 중립성 폐지는 거대 통신업체들의 배만 불릴 뿐 소비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라며 시민단체들과 연계해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파이 위원장이 망 중립성 폐지 방침을 천명한 11월21일부터 일주일 사이에 2000만 건 이상의 항의성 댓글이 FCC 웹사이트에 올라왔다.

ⓒReuter망 중립성 폐지를 주도하고 있는 아짓 파이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
폐지안 통과되면 통신사 횡포에 무방비

망 중립성 폐지 방침을 천명한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2000년대 초에 거대 통신망 제공업체인 버라이존의 법률 고문을 지냈다. 그가 통신업체들을 옹호하는 쪽의 망 중립성 전문가로 성장한 배경이다. 파이 위원장은 2011년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의 천거로 공화당 몫의 FCC 위원에 지명돼 상원의 인준을 받았다. 이후 FCC 위원으로 활동하며 망 중립성 폐지에 앞장서왔다.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망 중립성 규칙을 채택했을 때 누구보다 강력히 반대 의견을 표명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파이 위원장은 지난 1월 FCC 위원장에 공식 취임하자마자 AT&T, 버라이존, 티모빌(T-Mobil) 등 거대 통신망 제공업체에 유리한 조치를 강행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사례로, 이른바 ‘제로 레이팅(zero -rating)’에 대한 FCC의 조사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제로 레이팅이란 특정 콘텐츠에 대한 데이터 이용료를 면제 혹은 할인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그런데 통신망 제공업체가 콘텐츠 사업까지 겸업하면서 자사의 콘텐츠에만 제로 레이팅을 적용하면 불공정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 실제로 AT&T는 자사의 콘텐츠 사업인 디렉TV 나우 스트리밍 서비스를 월정 데이터 사용 한도에 구애받지 않고 무료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 다른 스트리밍 사업체들이 불공정 행위라며 반발하자, FCC는 지난해 하반기에 AT&T의 제로 레이팅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며 조사에 돌입했다. 이를 파이 위원장이 전격 중단시킨 것이다.

망 중립성 폐지 이후 부정적인 파장을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도 거대 통신사들의 이런 횡포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이 발행하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의 마이크 오커트 부편집장은 “망 중립성이 폐지되면 지금까지 아무 차별 없이 자유롭게 인터넷을 넘나들던 각종 콘텐츠가 차단 혹은 제한되거나 속도가 줄어들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통신망 제공업체들은 초고속 인터넷이 필요한 대형 언론사, 콘텐츠 업체 등과의 거래에서 사용료를 높일 수 있다. 구글의 인터넷 검색 속도를 늦추겠다며 돈을 더 받아낼 수도 있다. 그 부담은 결국 언론사 및 콘텐츠 업체의 소비자에게 다시 넘어간다. 탐사보도 전문 매체 〈마더존스〉의 케빈 드럼은 “인터넷 통신망 업체들이 망 중립성 폐지를 계기로 이용업체들과 수지맞는 계약을 체결할 개연성은 100%에 가깝다”라고 확언한다. 단적인 예로 그는 미국 굴지의 스트리밍 미디어 업체 넷플릭스가 이미 컴캐스트에 웃돈을 주고 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꼽는다. 관련 업계에서는 이 같은 관행을 ‘가격 우대제’라 부른다. 넷플릭스·구글·페이스북·트위터·훌루·아마존 같은 대형 업체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이용에 따른 추가 비용을 부담할 여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지만, 대다수 중소 규모 인터넷 관련 업체에게는 그럴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

일반 인터넷 사용자들도 망 중립성 폐지에 따른 여러 가지 폐해에 노출되어 있다. 단적인 실례는 망 중립성이 유명무실한 포르투갈에서 찾을 수 있다. 포르투갈의 최대 통신업체 MEO는 일반 소비자들로부터도 매월 기본요금과 함께 추가 사용료까지 받는다. 인터넷 콘텐츠를 여러 형태의 다발로 분리한 뒤 각각의 다발에 대해 ‘기본 데이터’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 등은 SNS 다발,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은 동영상 다발로 분류했다. 만약 소비자가 다른 다발에 속하는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각각 기본 데이터 이상 썼다면, 다발별로 추가 사용료를 내야 한다. 이런 일이 미국에서도 현실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정사실이 된 망 중립성 폐지를 보완하거나 되돌릴 묘책은 없을까? 현 단계에서 가장 확실한 대안은 12월14일로 예정된 FCC 표결을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다. 현재 FCC 분위기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에드 마키 연방 상원의원을 포함한 민주당 상원의원 9명이 최근 FCC에 망 중립성 폐지 연기를 촉구하는 연대 서한을 보냈지만 파이 위원장이 주도하는 FCC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망 중립성 폐지는 트럼프 행정부의 상징인 ‘정부 규제에 대한 보수파의 반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정치적 조치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오는 202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해야 비로소 트럼프 행정부의 ‘망 중립성 폐지’가 다시 폐지될 것이라는 의미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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