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시〉는 2011년 CBS에서 방송을 시작한 인기 교양 프로그램이다. 미국의 〈TED〉처럼 공개 강좌 형식으로 진행된다. 각계각층의 연사들이 15분가량 강연을 하고 영상은 CBS TV와 인터넷으로 공개된다. 현장 강의나 텔레비전 방송보다는 SNS가 주된 유통 플랫폼이다. 지난 6월 기준 포털·유튜브·페이스북 등 채널 구독자 수는 총 100만명, 누적 영상 조회수는 4억2000만 회가 넘는다. 수상 경력도 여럿이다. 방송통신위원회, 여성가족부, 한국기독언론인연합회, 환경재단 등에서 상을 탔다. 브랜드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난 5월 〈세바시〉는 CBS에서 독립했다. 프로그램 제작사의 공식 명칭은 ‘주식회사 세상을바꾸는시간15분(㈜세바시)’이다.
역풍이 불었다. 앞서 〈세바시〉에서 강연한 작가 손아람씨, 변호사 이은의씨, 모델 김지양씨 등이 나섰다. 본인 SNS에 ㈜세바시의 결정을 비판하며 “내 강연 영상도 내려달라”라고 썼다. ‘현장에서 강연을 방청한 성 소수자’라고 밝힌 누리꾼은 “강연자와 나, 그 강연을 보았던 수많은 성 소수자들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11월26일 ㈜세바시는 “강연자와 강연에 공감해준 분들에게 차별과 폭력을 저질렀음을 고백한다”라고 밝혔다. 다음 날 영상은 다시 공개됐다. 다만 강연 장면에 앞서 “이 강연은 CBS 채널을 통해 방송되지 않았으며, CBS와 전혀 관련 없음을 밝힌다”라는 자막을 넣었다.
CBS가 〈세바시〉 콘텐츠와 무관하다는 점은 사안의 핵심이다. 하지만 영상을 두고 격론을 벌인 양측은 모두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반동연은 11월27일 “눈 가리고 아웅” “도마뱀 꼬리 자르기”라는 표현으로 CBS를 비난했다. 같은 날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는 CBS에 “책임 있는 자세를 되찾기를 촉구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논평을 냈다. 한쪽은 CBS가 〈세바시〉를 단속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다른 쪽은 〈세바시〉에 가할지 모르는 압력을 경계한 것이다.
㈜세바시 측에 따르면 실상은 전혀 달랐다. 프로그램 기획이나 제작에 CBS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모든 콘텐츠는 구범준 대표가 총괄할 뿐 기타 결재 라인은 전혀 없다. 독립 이후에야 생긴 새로운 체계가 아니다. 이미 2013년부터 〈세바시〉는 사내 벤처 형태로 운영됐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업’으로 성장하며, 시청률 대신 매출로 평가받았다. 서류상으로는 지난 5월에 독립했으나 실질적 자율 운영은 4년 가까이 된 셈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세바시〉가 읽어 내린 독립선언문
반동연은 〈세바시〉 내용에 ‘훈수’를 두기 힘든 처지이다. 기독교방송을 표방하며 교회 헌금이 수익의 20%가량을 차지하는 CBS와 달리, 〈세바시〉는 교회 후원금을 받지 않는다. 강사들의 출연료는 강연에 대한 외부 협찬으로 지급한다. 강동희씨가 포함된 이번 기획은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협찬을 받아 제작됐다. 즉, 기획·제작·방송 어떤 방면에도 교회 돈은 들어가지 않았다.
‘독립성’은 이번 일의 책임 소재를 더 명확히 드러내기도 한다. 여러 추측과 달리, 영상을 비공개 처리하는 과정에 CBS의 외압은 없었다. CBS 담당자들과 의견은 주고받았으나 최종 결정은 ㈜세바시 측에서 내렸다. 영상을 내릴 때에는 ‘모기업 배려’가 이유였고, 다시 올린 까닭은 연사들과 팬덤의 보이콧이었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세바시가 맡은 ‘역할’은 소비자 반응에 기민하게 움직인 업체였을 뿐, 거대 자본에 맞선 투사는 전혀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바시는 CBS와 한국 교회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읽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남긴 진정한 자산은 연대의 힘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성 소수자도 사회 구성원’이라는 평범한 메시지조차 부정되자 사람들은 참지 않았다. 강연자 강동희씨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밝혔다. “간접 체험만 하던 혐오를 직접 당하게 되자 크게 놀랐고 위축됐다. 손아람 작가 등 다른 강연자들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줘서 버틸 수 있었다. 잃었던 희망을 다시 찾은 느낌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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