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의 초등학교 1학년생 학부모 최상미씨(가명·44)는 내년 새 학기부터 아이를 보낼 영어 학원 정보를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아이를 학교에서 진행하는 방과후 영어 수업에 보냈다. 월·화·수·목·금 매일 40분 수업에 교재비까지 포함해서 월 4만5000원, 최씨가 선택한 가장 ‘가성비 좋은(가격 대비 성과)’ 영어 교육 수단이었다. 그런데 내년 3월부터는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 영어 수업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최씨가 알아본 학교 앞 영어 학원비는 한 달 최소 20만원이 넘었다. 최씨는 무리해서라도 학원에 등록할 생각이다. “방과후 영어 수업이 없어진다고 대체 누가 아이 영어 교육을 안 시키겠어요? 저만 하더라도 다른 생활비를 줄이면 줄였지 아이 영어 공부를 중단시킬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시사IN 이명익12월8일 서울의 한 초등학교 앞 영어 학원으로 학생이 들어가고 있다.
내년 3월부터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학교 시간표에서 영어가 사라진다. 2014년 3월 제정된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결과다. ‘선행교육 금지법’이라 불리는 이 법 제8조 1항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학교는 국가 교육과정 및 시·도 교육과정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하여야 하며, 편성된 학교 교육과정을 앞서는 교육과정을 운영하여서는 아니 된다. 방과후학교 과정도 또한 같다.” 정규든 방과후든 교육과정상 진도를 벗어나는 교과 선행학습은 불법이다. 현행 교육과정상 영어는 초등학교 3학년 수업에서 처음 가르치도록 되어 있으니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 영어 수업도 불법이다.

다만 시행일(2014년 9월12일) 하루 전 조항 하나가 신설됐다.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의 영어 방과후학교 과정은 적용이 배제된다(시행령 제17조).” “현실성이 없다” “영어 사교육 시장만 커질 것이다”와 같은 방과후학교 영어 강사와 학부모들의 반대 민원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 예외 조항의 유효기간은 내년 2월28일. 기한을 앞두고 또 한 번 연장할지 말지 고심하던 교육부는 지난 11월 말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당장 방과후 교사와 학부모들 사이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11월28일 전국방과후법인연합 관계자와 학부모 등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 정책을 재고해달라는 청원에도 1만7000명 가까이 참여했다. 이들은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가 “실제 교육 현장을 모르는 탁상공론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학부모와 방과후 교사들이 체감하는 교육 현실에서 영어 교육 수요란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과 같다. 서울에서 방과후 영어를 가르치는 강수진씨(가명)는 최근 학교 정문 앞에서 주로 1·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학원 홍보 전단지를 자주 목격했다. 학원들은 “방과후 수업처럼 5일 내내 수업을 해드립니다” “2018년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 대책은?” 따위의 문구로 ‘방과후 영어 금지 특수’를 노리고 있었다. 강씨는 “유예기간 동안 사교육을 막는 대책을 세워놓지도 않은 채 무작정 방과후 수업만 금지한 탓에 불안해진 부모들을 모두 영어 학원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풍선은 아래로도 부푼다. 서울 잠실동에서 초등학교 1학년·유치원생 남매를 키우는 학부모 김지현씨(가명·35)는 내년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 소식을 듣고 둘째 아이를 인근 영어유치원 대기자 목록에 올렸다. “이 동네에서 인기 좋은 영어 학원은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돈이 있어도 아이를 보내지 못한다. 초등 저학년 때 방과후 영어 수업으로 슬슬 워밍업하며 실력을 갖추다 고학년 때 본격적으로 학원에 보낼까 하던 엄마들이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로)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아예 유아 때부터 영어유치원에서 일찍이 기초를 닦고 저학년부터 레벨 테스트를 하는 학원으로 보내려고 방향을 바꾼 거다.”

“영어는 빈부격차가 많이 드러나는 과목”

교육 불평등이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인천 남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영어 수업을 맡은 박혜원씨(가명)는 “내 수업을 듣는 아이들 가운데 30% 정도는 정부 지원금으로 방과후 수업을 듣는 저소득층 가정 학생들이다. 이 아이들은 방과후 영어 수업이 없어지면 아예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 영어 교육을 접할 수 있는 길 자체가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1인당 연간 60만원까지 지원되는 ‘방과후학교 자유수강권’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73만3861명(지난해 기준)에게 지급됐다.

사교육 시장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위치는 남다르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지난해 초·중·고교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사교육비 지출 1위 교과목이 영어(1인당 월평균 6만7000원, 수학은 4만원이다)이다. 전체 초등학생의 40.1%가 영어 사교육에 참여한다. 서울 중구의 초등학교에 출강하는 방과후 영어 교사 김미선씨(가명)는 “가정 형편 탓에 사교육을 못 받아 친구들보다 영어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수업 시간에 주눅이 들어 있다. 다른 과목보다 영어는 특히 빈부격차가 많이 드러나는 과목이다”라고 말했다.

‘학원 보내기는 부담스럽고 안 시키기는 불안한’ 부모들의 영어 사교육 수요를 그나마 학교 안에서 저렴하고 온건하게 흡수해주는 ‘현실 타협안’과, 영어 선행교육을 규제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되는 공교육의 영어 교육과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원칙’ 사이에서 이번 정부는 후자를 선택했다. 문제는 원칙의 기본 전제, ‘모든 학교는 정상적으로(차근차근, 낮은 수준부터) 영어 교육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사회적으로 아주 낮게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알파벳은 다 배워왔지?”라며 바로 영어 에세이 숙제를 내줬다더라, 첫 수업부터 영어로 자기소개를 시켰다더라 등의 소문이 많은 유아와 초등 저학년생들을 영어 학원가로 내몬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구본창 정책국장은 “정부가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 조치를 할 때 초등학교 3학년 영어 교육 내실화 방안도 함께 내놓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구 정책국장은 “최근 초등학교들에서 많이 적용하고 있는 한글 책임 교육이 좋은 선례다. 입학하면 바로 받아쓰기를 하거나 알림장을 쓰게 하지 않고, 한글 수업 시간을 대폭 늘리고 기초부터 가르치면서 학부모들이 조금씩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신뢰가 쌓이면 긍정적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가 한글처럼 영어도 선행교육 없이 가능하다는 신호를 학부모들에게 명확하게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영어 수업과 함께 어린이집, 영어 유치원 등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유아 대상 영어 선행교육과 학교 밖 사교육기관의 영어 선행교육 금지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부 관계자는 “반대가 있을 것은 예상했지만 법 제정 때부터 예고한 대로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영어 수업도 선행교육 금지의 대상으로 예외 없이 포함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미 내년 초등학교 3학년생이 적용받을 ‘2015 개정 영어 교육과정’에 따르면 선행학습이 되어 있지 않더라도 기초부터 잘 따라갈 수 있게끔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짜여 있고 교사 연수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신뢰를 갖고 학부모와 교사와 학교가 함께 노력해갈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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