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구나.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한자성어보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한 해였다고 얘기할 수 있겠구나. 그 정점이 될 만한 뉴스가 며칠 전 세상을 울렸지.
2012년 MBC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해고당했던 최승호 PD가 1997일 만에 놀랍게도 MBC 사장이 되어, 정들었던 그리고 그리웠던 터전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뉴스였어. 부당한 권력 앞에서 꼬리를 부채처럼 흔들어대던 MBC 경영진이 쫓겨나고 “별 증거도 없이 해고된”(한 경영진이 이렇게 말했다는구나) 최승호 PD, 아니 최승호 사장이 진지함을 부수고 호탕하게 웃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빠는 문득 37년 전 이맘때를 떠올렸다.
1980년 당시 아빠가 볼 수 있는 채널은 단 3개였어. 국영방송 KBS, 문화방송 MBC, 또 하나가 동양방송 TBC였다. 이 셋 가운데 단연 인기를 누린 방송사는 TBC였어. KBS는 근엄한 어른들만 나오는 칙칙한 방송이었고 MBC도 TBC가 주는 아기자기한 재미에 미치지 못했지. 특히 아빠의 동심을 지배한 애니메이션은 대개 TBC가 소개했단다. 〈이겨라 승리호〉 〈정의의 소년 캐산〉 〈그레이트 마징가〉,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는 주제가로 유명한 〈짱가〉 등 헤아릴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 TBC를 통해 전파됐고, 〈소년 홍길동〉 〈왕짱구〉 〈오성과 한음〉 등 ‘어린이 드라마’를 통해 어린 날의 아빠를 열광시킨 것도 TBC였지.
TBC는 명실상부한 드라마 왕국이었어. TBC가 1970년에 방송한 〈아씨〉는 당시 활개 치던 좀도둑들이 그 드라마가 방송되는 시간을 노린다는 소문(정신없이 드라마만 보고 있으므로)이 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그 후로도 여러 드라마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했지. 1979년 6월, TBC 최고의 히트작은 〈야 곰례야〉라는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상류층들의 생활을 주로 그리던 당시 드라마의 공식을 깨고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올라온 시골 처녀 곰례(정윤희)를 주인공으로 삼아 당시 서울에 흔하던 한 지붕 여러 가족의 주거 형태, 즉 좁은 마당을 둘러싸고 방마다 서로 다른 가족들이 아웅다웅 알콩달콩 살아가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었어.
이어서 〈달동네〉라는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아빠는 별안간 TBC가 없어진다는 소문에 아연실색했어. 1980년 11월12일 국군 보안사령관 노태우는 전국 유수의 언론사 사주들을 ‘간담회’에 초청했어. 초대 장소는 보안사령부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가 등을 잡아 족치던 악명 높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서빙고동에 있다고 이렇게 불렀어)이었지. 거기서 몇몇 언론사주들은 황망한 요구를 듣게 돼. “앞에 있는 각서에 서명하시오.” 내용인즉슨 ‘새 시대를 맞아’ 멀쩡히 운영되던 언론사를 조건 없이 포기한다는 것이었어. 저 언론사와 이 언론사를 결합시켜 제 맘에 흡족하고 제 말에 벌벌 기는 언론 환경을 만들겠다는 독재 권력의 폭거였지. 한국 언론 사상 씻을 수 없는 치욕, ‘언론 통폐합’이 벌어진 거야. 7개 중앙 종합지 가운데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에 붙여졌고 지방 신문은 ‘1도(道) 1사(社)’ 원칙이 적용됐으며 오랜 역사를 지닌 동아방송과 1964년 창립돼 16년 역사를 지닌 동양방송 TBC는 KBS에 합쳐지는 것으로 그 역사를 끝내게 돼. 이게 KBS 2채널의 시작이야.
“언론이 질문을 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1980년 11월30일은 아빠의 열 살 생일이었지만 그날은 결코 즐거울 수 없었어. TBC가 그 마지막 방송을 내보내는 날이었기 때문이지. TBC 소속 연기자나 성우들은 처우가 좋아서 회사에 애착이 컸다고 해. 쟁쟁한 스타들이 나와서 울먹이면서 TBC의 마지막을 알렸지. 그 가운데 이은하라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다 그만 펑펑 울어버렸고, 카메라맨이고 연출진이고 그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하는구나. 그 마지막 심경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 MC 황인용씨의 처절한 멘트에서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인 것 같습니다. 남은 5분이 정말 야속합니다. 10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5분이 10분이 될 수는 없습니까. 아 4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저도 이제 헤드폰을 벗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BC의 모든 것이 없어지지는 않았고, 드라마 〈달동네〉도 아빠가 즐겨 보던 〈바람돌이 소년 장영실〉도, 그 외 많은 연기자와 방송인들도 KBS 2TV에서 볼 수 있었지만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1000명이 넘는 언론인들은 직장을 잃었어. 회사를 합치는 과정에서 정권과 회사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이들을 솎아냈기 때문이지. 정권이 언론사를 레고 조각 취급하고 언론인을 레고 조각에 낀 때로 취급하던 시대, 양심적 언론인들은 직장을 잃고 서적 외판원이 되거나 막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고 어떤 이는 술독에 빠져 세상을 저주하다가 스러져 가기도 했어. 당시 분위기를 드러낼 일화 하나를 더 들어볼게.
TBC를 ‘먹은’ KBS는 정권에 이런 ‘의견서’를 낸다. “평소 소속감이 전혀 없는 가수들로 하여금 울면서 노래하도록 연출상의 유도를 함으로써 장내를 숙연 내지는 애상에 싸이게 했을뿐더러 시청자들에게까지 최루작용을 함으로써 일부 국민감정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었음(〈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 편〉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한 방송사를 생으로 문 닫게 하면서 그 마지막 석별의 정마저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너로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나 싶겠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론과 언론인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는 노력은 그 뒤로도 꾸준히 이어져왔단다. 지난 9년간 MBC에서는 21세기판 ‘언론 통폐합’이 벌어져왔다고 볼 수 있어. 한국을 대표하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주산지였던 MBC는 그야말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락했다. 방송계에서 손꼽는 유능한 PD로 하여금 스케이트장에서 얼음을 닦게 했고, 말 안 듣는 기자들을 사정없이 잘라냈고, 분노에 찬 그들 앞에 “고통도 축복입니다” 하며 조롱하기를 서슴지 않았어. 청와대에 불려가 ‘조인트’를 까이고 돌아와서는 더 악착같이 언론 후배들을 몰아내는 사장, 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송곳처럼 잡아내고 시사교양국을 없애버려 방송의 사회 비판 기능을 아예 말살하려 들었던 간부들. 그들이 1980년대 ‘언론 통폐합’을 위해 언론인들을 협박하던 보안사 간부들과 다를 게 무엇이며, 고별 방송 때 눈물마저 트집 잡으며 정권에 아양을 떨던 언론인들과 어디가 얼마나 차이 날 수 있겠니. 이제 그 기나긴 세월을 돌고 돌아서 MBC 시사교양국의 맹장이었던 최승호 PD가 MBC의 사령탑이 되었다. 그 아저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 “언론이 질문을 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지난 9년 동안 이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면 이제 다시 흥성해지기를 기도해야겠지. 함께 기도해보자꾸나. 새해에는 우리 언론이 제대로 서기를, 질문이 많아지기를, 그 질문으로 우리가 더 진실에 가까워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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