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12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이 발표되었다. 대입 스트레스와 결별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수능을 떠올리면 왠지 주변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고 긴장된다. 대학생이 되고, 졸업할 때까지 남들도 다 그런 줄 알고 살았다.
수능은 온 힘을 다해 준비해야만 하는 일생일대의 이벤트라는 완고한 사고는 강릉에 첫 발령을 받고 나서야 깨지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 초임 교사는 다소 무리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생활 여건이 열악한 곳이니,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을 위해 내 모든 지식과 교양을 기필코 전수하고 말겠다는 과격한 의지가 있었다.
초보 선생님의 상상 속 제자와 달리 두툼한 점퍼를 껴입은 아이들은 심드렁했다. 수학 단원평가 점수가 15점이나 떨어져도 원래 그러려니 하며 공부에 통 관심이 없었다. 성적이 떨어져서 펑펑 우는 아이가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애들이 기대에 못 미치자 슬금슬금 답답함과 조급함이 기어 올라왔다.
“너네 이렇게 공부 안 하면, 커서 뭐 될래?” 맙소사! 그토록 증오했고 듣기 싫었던 말을 경력 석 달 된 초임 교사가 화내며 아이들에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이 진부한 문장이 입을 떠나 고막을 때리는 순간, 아차! 하면서도 또 입술을 뗐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수능 치고 대학 가서 꿈 이루는 거예요!”
반응이 없었다. 의도적 무시라고 보기에는 표정이 너무 천진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비교육적인 데다, 위험한 표현을 함부로 내뱉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못난 담임의 공격적인 발언에도 네다섯 명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해를 거듭할수록,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었고 그제야 어쩌면 수능에 목숨 거는 사람이 절대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대부분이 ‘상위권 대학에 가겠다’ ‘인기 직업을 얻겠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대학에 가려고 정교하게 전략을 세우고, 전폭적으로 투자하는 집단은 한정되어 있었다.
교실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있지 않다
학창 시절 경쟁에 찌들어 있던 나는 수능을 망치면 그저 그런 인생을 살게 된다고 자기암시를 했다. 이제 선생님이 되었는데, 제자들은 어쩌지? 교실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있지 않았다.
삼척으로 전근한 이후 시름은 더 깊어졌다. 변변한 입시 학원 하나 없는 산골에 사는 아이들은 솔직히 입시 전쟁터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려워 보였다. 아이들은 느긋한데 담임만 마음이 초조했다. 신규 부임 때처럼 애들을 닦달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제자들을 돕고 싶었다.
수능 대박이 아니어도 잘 살 방법은 많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려면 공부해야 한다. 대입 준비 얘기가 아니다. 자기 길을 소신껏 걷기 위한 지식과 기능, 삶의 태도를 익혀야 한다. 명문대 진학 여부로 사람을 평가하면 공부 못하는 애들은 평생 열등생 신세를 면치 못한다. 수능 점수와 자기 인생 등급을 동일시하지 말라고 자꾸 알려줘야 한다.
‘영어, 다섯 살에 시작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광고를 상식인 양 접하는 사회에서 자기 속도로 자기만의 길을 걷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으로 귀하게 태어난 존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끌 의무가 있다. 적어도 수능 점수 몇 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세상은 되지 않도록 지혜와 용기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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