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돈 문제처럼 보였다. 12월4일 인터넷 유료 만화 플랫폼 ‘레진코믹스(레진)’에 작품을 연재했던 ‘회색’ 작가가 트위터에 “지금껏 (레진 측에) 1000만원이 넘는 지각비를 내왔다”라고 밝혔다. ‘지각비’는 레진이 정한 마감 시점에 작품을 입고하지 못했을 경우 작가 매출에서 최대 9%까지 벌금을 물리는 제도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논란이 불거진 바 있지만, 회색 작가의 폭로가 다시 불을 붙였다.

이즈음 레진에 작품을 연재하는 또 다른 작가의 이야기가 SNS에 퍼졌다. 이 작가는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의 병수발로 처음으로 마감을 어기게 됐고, 이런 사정을 설명하자 레진 담당자는 진료 영수증 등 증빙서류 제출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가 “네가 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네”라는 유언을 남기고 투신했다는 사연이었다.

이런 사연들이 알려지고 지각비 문제 등을 지적하는 다른 작가의 폭로가 잇따르면서 SNS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급기야 12월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레진코믹스에 대한 세무조사를 부탁드립니다’라는 국민 청원이 제기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작가’ 명의로 시작된 이 국민 청원은 지각비 논란, 수익 배분 문제, 작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웹소설 사업을 중단한 일 등 레진과 관련한 총체적 문제점을 망라했다. 12월15일 현재 5만여 명이 청원에 참여했다.
 

ⓒ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레진코믹스 관련 청원.

사태가 일파만파 번지자 레진코믹스는 이례적으로 긴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요약하면 현재 밀린 원고료는 모두 정산되었고, 지각비는 이후 폐지하기로 했으며, 수익 배분 구조는 합당하다는 주장이었다. 세무조사 문제를 의식해서인지, 자사의 영업손실 금액까지 공개하며 회사가 여전히 적자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반박 내용 가운데 회색 작가에게 그동안 지급된 원고료를 공개함으로써 또 한 번 논란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레진은 입장문 말미에 “레진코믹스와 성실히 일하는 작가의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입장문 발표 이후에도 레진에 대한 여론은 싸늘하다.

레진코믹스는 왜 이런 무리수를 뒀을까. 왜 기존 웹툰 시장에 존재하지 않았던 지각비를 만들어냈을까. 야심차게 진행해왔던 웹소설 사업을 왜 작가들과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중단했을까. 무엇보다 작가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달할 때까지 사태를 방치한 이유가 뭘까.

시계를 돌려보자. 레진코믹스는 한때 국내 만화산업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2013년 6월 유명 블로거(레진닷컴)가 중심이 되어 오픈한 레진은 ‘친작가·반포털’을 표방하며 포털사이트의 ‘무난한 작품’에 염증을 느낀 성인 이용자를 끌어들였다. 가장 뚜렷한 성과는 코인 결제 시스템을 만들어 이용자가 작품을 유료로 보도록 했다는 점이다. 포털과 달리 댓글 기능을 없애고 이용자가 작품 열람과 유료 결제에만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콘텐츠 유료화 모델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대성공을 거뒀다. 작가에게 최소 수입 200만원을 보장하고 발생한 수익분을 작가와 나누는 등 획기적인 행보도 보여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펴낸 〈2016 만화산업백서〉는 “레진의 이 같은 정책은 웹툰의 장르적 다양성을 강화시켰고 작품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구실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레진은 2014년 ‘대한민국 인터넷 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런던 순방에 함께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신생 벤처기업이 4년 만에 누적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데에는 이처럼 레진에 대한 후한 사회적 평가도 한몫했다. 웹툰 정보 사이트 ‘웹툰가이드’에 따르면 12월15일 현재 플랫폼 분야에서 레진코믹스는 네이버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강남역에 부착된 레진코믹스 광고물.

PD 1명이 20개 이상 작품 담당해

레진코믹스를 운영하는 회사의 정식 명칭은 ㈜레진엔터테인먼트다. 회사명에서 보듯 만화 콘텐츠를 기반으로 게임·영화·드라마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자사 인기 작품인 〈레바툰〉을 모바일 게임으로 출시하는 등 사업 다각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직원 규모도 100명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레진코믹스를 담당하는 PD 인력은 10명이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레진코믹스가 적어도 200개 이상 작품을 연재 중인 점을 감안하면 PD 1명당 20개 이상 작품을 담당한다는 이야기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17년 통계에 따르면 레진코믹스 연재 작품 수는 네이버나 다음보다 무려 2배가량 많다. 이 때문에 적은 인력으로 무리하게 작가와 작품을 관리해오다 이런 문제가 불거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레진 측은 국민 청원에 대한 입장문에서 “규모에 비해 직원 수와 콘텐츠 담당자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도 맞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만화계 안팎에서는 작가주의를 표방하며 등장한 레진이 전형적인 기업 경영 방식으로 작가를 옥죄며 성장하고 있다는 반발이 나온다.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는 “레진의 행보를 보면 게임, 영화 등을 상위에 두고 만화를 하위 콘텐츠로 대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창작자와 창작 환경을 무시하면서 레진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레진은 억울할 수 있다. 원활한 사이트 운영을 위해 거래처(작가)와 ‘납입 지연에 따른’ 페널티 조항을 두고, 수익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웹소설)을 중단한 게 무엇이 문제냐는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한 만화계 인사는 “레진과 작가들은 지금 동상이몽 상황이다. 기업 논리와 작가 논리가 부딪치면서 접점을 못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레진 사태를 보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키위툰 사건’을 떠올린다. 2013년 오픈한 유료 웹툰 플랫폼인 키위툰은 작가와 불공정 계약으로 논란을 빚었다. 저작권과 광고 수익을 회사가 가져가는 것은 물론, 연재 중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계약 조건이었다. 작가들이 반발하자 소송으로 번졌고, 전원 계약 해지라는 결과로 마무리됐다. 키위툰은 이듬해 사업 악화로 문을 닫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웹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시장은 돈벌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수많은 웹툰 플랫폼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작가와 플랫폼을 연결해준다는 명목으로 수수료를 챙기는 에이전시가 난립했다. 억대 연봉 작가가 조명받는 그늘에는 여전히 배고프고 서러운 대다수 작가들이 가려져 있었다. 레진코믹스는 그런 빈틈을 잘 파고들어 성공을 거뒀지만, 이제 무거운 질문에 부딪혔다. 기업과 작가는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 레진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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