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가난해도 5인 이상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거실이 있다. 미혼이거나 분가하지 않은 자식들(심지어 부모나 형제까지)이 한데 모여 살아야 하니 (마당이 있는) 2층 단독주택이 필요하다. 이들은 명절도 아닌데 자주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일상을 공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녁이 있는 삶’도 필요하다. 어디 그뿐일까? 이 가족은 징글징글하게 갈등을 겪으며 해체될 위기에 처하지만 결국 화해한다. 심지어 자식들은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주말 가족 드라마를 보면 빠지지 않는 풍경이다. 가끔 출생의 비밀이라든가, 재벌가와 얽힌 서사가 첨가되지만 언제나 주인공은 가족이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이런 풍경이 당연한 걸까?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가구 구성 비율 중 5인 이상의 가족은 고작 6.2%다. 반면 1인 가구 비율은 27.9%로 가장 높다. 부모는 점점 늙어가고 자식들은 더는 가족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아니 그게 불가능한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주말 가족 드라마가 그동안 성실하게 재현한 가족 풍경은 이제 실화가 되기 힘들다. 가족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가족주의’로서 전통 체계는 이제 보편적이지 않다. 통계뿐 아니라 의식이나 라이프스타일도 그렇다. 빠르게 ‘탈가족주의’화로 가고 있다.

ⓒKBS 갈무리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서 딸 서지안(신혜선)은 아버지에게 “같이 있기가 힘든데 가족이면 무조건 같이 살아야 하는 거예요?”라고 묻는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주말 가족 드라마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 얼마 전 종영한 〈아버지가 이상해〉(KBS 2)는 결혼 인턴제, 졸혼 등 비교적 최근 이슈를 다뤄 화제가 되었다. 전통 가족 체계를 유지하고 싶은 부모 세대의 관습과 가족 재생산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사는 자식 세대의 변화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다. 〈아버지가 이상해〉 후속인 〈황금빛 내 인생〉(KBS 2)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이것은 가족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한다.

한때 가장이 건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중산층 가족이 부도를 맞으며 단란한 가족은 해체된다. 능력 있는 사장이며 좋은 아버지였던 가장 서태수(천호진)는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게 되고, 장남 서지태(이태성)는 가족이 살 전셋집을 구하느라 빚을 떠안게 된다. 조각가를 꿈꾸며 미대 입시 준비를 하던 장녀 서지안(신혜선)은 취업이 잘 된다는 경영학과에 진학해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입사하지만 ‘금수저’ 동료에게 정규직 자리를 빼앗긴다. 설상가상으로 어릴 때 길 잃은 아이를 데려와 지안의 쌍둥이 동생 지수(서은수)로 키웠는데 어느 날 친부모가 나타난다. 그들이 재벌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서태수의 아내 양미정(김혜옥)은 ‘고생한 친딸이 재벌가에 가서 편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딸을 바꿔 소개하고, 이 거짓말이 들통 나 위기에 처한다. 그 충격으로 집을 나간 딸 서지안은 집으로 돌아가자는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며 반문한다. “같이 있기가 힘든데 가족이면 무조건 같이 살아야 하는 거예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인생을 바쳤지만, 아내를 비롯한 자식들은 누구도 가장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원망하며 경멸한다. 그런 현실에 절망하던 서태수는 결국 ‘가장 졸업’을 선언한다. “나 이제 이 집 가장 졸업이야. 이젠 다 각자 알아서 살아.” 위기 가운데서도 유지되어온 가족의 서글픈 종말이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듯 그동안 주말 가족 드라마에서 수없이 반복한 ‘5인 이상 가족이 둘러앉아’ 밥 먹는 장면이 이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는다.

가족이 둘러앉아 밥 먹는 장면이 없다  

이런 부모의 이야기 반대편에는 자식들의 사정이 있다. 장남 서태수는 가족이 살 집을 구하느라 빚을 지고, 재수하는 동생 학비까지 대느라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다. 연인이 있지만 ‘비혼 커플’이다(현재는 결혼했으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장녀 서지안은 가족을 떠난 뒤에야 자신의 삶을 제대로 직면하게 된다. “당신 인생은 당신이 사는 거야. 남들 보라고 사는 게 아니라고”라는 하우스메이트의 충고에 “계약직끼리 ‘우리’가 어디 있어?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야 사는 거야”라며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견디던 삶조차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깨닫는다. 재수하던 막내 서지호(신현수)는 대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겠다며 독립한다.

ⓒKBS 갈무리재벌가인 해성그룹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태수 가족의 건너편에는 가장의 명령으로 유지되는 재벌가 해성그룹 가족이 있다. 이들은 그룹을 유지하기 위한 통제와 규범만 존재하는 ‘비즈니스 패밀리’다. 그 가족의 일원이 된 서지수는 그곳이 ‘가족’이 아님을 폭로하며 그 질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 해성 그룹 후계자로 훈육받으며 자란 아들 최도경(박시후)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재벌 3세’의 자리를 포기하고 독립을 선언한다. 서태수 가족이나 해성그룹 가족이나 우리가 가족이라 여기던 곳이 더는 ‘가족’이 아니라는 ‘개인’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니들 애비여서 미안”해 하던 부모와 “가족이면 무조건” 이해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관습을 거부하는 자식들이 서로 독립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발간된 책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김희경은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에 관해 “사회가 근대화되면 가족이나 집단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개인화도 같이 진행된다는 게 상식이다. 한국은 이만큼 사회가 복잡해지고 분화됐는데도 여전히 가족주의의 영향이 뿌리 깊다”라고 진단한다. 사회는 분화되었지만, 개인은 가족에서 미처 분화되지 못한 비정상 사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부장·혈연 중심 가족주의의 불가능성, 가족의 재구성, 온전한 개인의 탄생 등은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사회 기초단위는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며, 개인이 행복해야 가족이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준비하며 그동안 방영한 주말 가족 드라마(KBS 기준) 제목을 쭉 살펴보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지난 5년 동안의 드라마 중 ‘나’가 들어간 제목은 〈황금빛 내 인생〉이 처음이다. 이제야 비로소 가족에게서 벗어나 ‘나’ ‘내 인생’을 더듬더듬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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