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 좀 외쳐봤다. 최루 가스 좀 맡아봤다. 백골단에 쫓기거나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에 대학을 다녔는데도 그랬다. 당시 학교에는 “데모 좀 해봤다”라는 선배들로 넘쳐났다. 졸업한 뒤 나 역시 “데모 좀 해봤다”라고 떠벌리는 축이었다. 위험은 부풀리고 활약은 과장하기 일쑤였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시대였다. 군사정권 때든 문민정부 때든, 호기심 때문에라도 다들 한두 번은 슬쩍 시위 대열의 끝자락에 서보던 시절이니까, 우리의 20세기는.
그런데 영화 〈1987〉은 1987년의 서울로 관객을 데려가면서, “데모 좀 해봤다”고 자랑 한번 못해본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훗날’을 맞이하지도 못한 채, ‘왕년’을 추억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영원히 1987년의 겨울에 갇힌 사람. 박종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스물두 살 대학생.
1987년 1월14일, 응급처치를 위해 다급하게 불려온 의사의 겁에 질린 얼굴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사인을 감추려고 서둘러 화장을 시도하는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과 졸개들이 다음 장면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가 부검을 명령하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은폐’에 실패하자 ‘조작’으로 방향을 바꾼 경찰.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나온 게 이때다. 또 하나의 진실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고 그들은 자신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기만 입 다물면 그만인데도 기어코 입을 여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난다. 자기가 다칠 걸 알면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행동이 이어진다. 시신에 남은 고문 흔적을 기자에게 몰래 귀띔한 의사, 보도 지침을 어기고 그 내용을 기사로 쓴 기자(이희준), 그 기사를 지면에 싣기로 결정한 데스크(고창석), 잡혀온 고문 경찰관들이 털어놓은 숨은 공범의 존재를 밖으로 알린 교도관(유해진)…. 그렇게 수많은 개인들이 제 몫의 위험을 감수한 뒤, 자주 이런 대사를 한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바위를 향해 줄지어 몸을 날린 계란들
영화 또한 스타를 대거 캐스팅한 뒤 대부분 순차적으로 등장시킨다. 배우들은 마치 계주를 하듯 이야기의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고 빠진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해주세요’라는, 작지만 단단한 결심으로 거대한 바위를 향해 줄지어 제 몸을 날리는 수많은 계란들의 아름다운 릴레이. 그대로 ‘1987년 6월 항쟁’까지 달려간다. 박종철로 시작해 이한열로 맺는다. 도저히 울지 않을 재간이 없는 영화다. 그들이 죽었기에 내가 죽을 위험을 면한 주제에, 감히 “데모 좀 해봤다”고 떠벌린 지난날이 부끄러워서 혼났다.
1987년.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는 실제로 목숨을 빼앗겼다. 그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웠던 청춘의 후일담’을 얻었지만, 정작 그들의 청춘은 차가운 영안실에서 끝장났다. 그날이 오면, ‘그날’을 만끽할 자격이 누구보다 충분한 이들이었지만 한순간도 ‘그날’의 공기를 마셔보지 못하고 묻혔다. 이 미안하고 고마운 역사를 영화로 처음 기억하기까지 꼬박 30년 걸렸다. 〈1987〉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바통을 이어받아 그 시대를 그려낼 다음 영화를 나는 벌써부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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