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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인이 꼽은 2017년의 책

2018년 01월 02일(화) 제537호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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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출판이 ‘흐름’을 탔다. 지난해 시한부 판정을 받은 36세 의사의 마지막 기록을 담은 <숨결이 바람 될 때>에 이어, 올해는 국내서 <라틴어 수업>과 번역서 <힐빌리의 노래>로 출판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 편집자의 말마따나 “자기계발서부터 르포르타주까지, 먹고살면서도 품위를 지키는 법”을 보여줬다. 올해 가장 두각을 나타낸 출판사를 묻는 질문에도 흐름출판은 민음사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지지를 받았다.

흐름출판의 행보는 여러모로 눈에 띈다. 2003년 창사 이후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서를 주로 내왔다. 인문서를 함께 펴내기 시작한 지는 5년 남짓. 짧은 기간에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특히 5만 부 넘게 팔린 <라틴어 수업>의 경우, 1쇄를 다 팔기도 어려운 출판계의 불황을 떠올려보면 이례적이다. 백지선 흐름출판 주간은 “인문학의 근간을 다루는 책이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하게 제시되면 얼마든지 잠재 수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 책”이라고 자평했다.

ⓒ시사IN 신선영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 진열된 작은 크기의 문고본 책을 독자들이 읽고 있다.
<라틴어 수업>은 한국인 최초이자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가 된 한동일 신부가 2010년 2학기부터 2016년 1학기까지 서강대에서 진행한 ‘초급·중급 라틴어’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한 강연록이다. 학생 24명으로 시작한 첫 수업은 다음 학기에 67명으로, 그다음 학기부터는 200명이 넘는 학생이 듣는 수업이 됐다. ‘명강의’라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 대학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청강을 했다. 강의실은 늘 만원이었다. 2015년 10월 <조선일보>에 한동일 신부의 강의가 소개된 이후 출판 계약을 했다. 그동안 10권이 넘는 책을 냈지만 1000권 이상 팔린 책이 없는 저자였던 한 신부는 <라틴어 수업>으로 여러 출판사가 계약하고 싶어 하는 저자가 되었다. 수업 첫날 칠판에 ‘Prima schola alba est(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 즉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를 적고 운동장에 나가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라는 숙제를 내주곤 하는 한 신부의 수업은 단순한 언어 공부를 넘어 삶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라틴어 수업>에 대한 출판계 동료들의 평가도 따뜻했다. “어렵게 쓰자면 한없이 어려울 수도 있는 소재인데, 교양서라는 본분에 충실하게 읽기 좋은 글이 나왔다(이진 사계절 인문팀 팀장).” “마치 어학 교재와 같은 제목을 달고 ‘종합인문교양’이라는 만족감을 독자에게 주는 책이다. 라틴어라는 생소한 언어로 독자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고 교양의 세계로 연결시킨 필력과 기획력이 모두 돋보인다(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올해의 책’ 국내서 10권 중 4권이 문학


라틴어만큼이나 낯선 학문인 ‘사회역학’을 다룬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도 출간 3개월 만에 5쇄를 찍었다. 첫 책을 낸 젊은 과학자의 행보에 여러 출판인이 주목했다. 저자인 김승섭 교수는 ‘올해의 필자’를 묻는 질문에서도 편집자들의 압도적인 선택을 받았다(74~75쪽 기사 참조).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차별과 고용 불안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해치는지 연구해온 저자가 데이터를 통해 해고 노동자, 성 소수자, 직업병 환자 등이 앓고 있는 질병의 발병 책임이 사회에 있음을 입증해낸 과정과 질문을 기록한 책이다. 한 편집자는 “사회역학이라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의 문을 열어줬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과 슬픔이 그 개인의 것이 아님을 학문을 통해 이름 붙여주며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준 귀중한 책”이라고 말했다.

<시사IN> ‘행복한 책꽂이’ 출판인 대상 설문은 추천 책의 분야를 나누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선정되는 책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치중될 가능성이 높았고, 매년 그런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올해 목록은 좀 다르다. 문학 작품이 순위권 안에 네 권이나 추천받았다. 절반에 가깝다(지난해 집계 순위 안에 든 문학 작품은 <안녕, 주정뱅이>(창비)가 유일했다).

특히 “하나의 현상에 가까운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은 물론이고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민음사)가 여러 출판인에게 언급된 점이 눈에 띈다. 두 작품은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통해 나온 책들로, 한 편집자는 이 시리즈가 “침체되었던 국내 소설 분야에 활기를 가져왔다”라고 말했다. 민음사는 내부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의 성공이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전반의 인지도를 높인 것으로 평가한다.

김애란 작가가 <비행운>(2012, 문학과지성사)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은 ‘명불허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김태형 제철소 대표는 “독자로서 한 젊은 작가의 성장과 변화를 꾸준히 지켜보는 즐거움. 그것이 문학적 성취보다는 인간과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깊어진 내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반갑고 고맙다”라고 말했다. <바깥은 여름>은 제48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사)는 출판인의 추천을 받은 열 권 중 유일한 시집이다.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의 세 번째 시집으로 그동안 써왔던 시들을 6년 만에 묶었다. 김수한 돌베개 주간은 “덜 모르겠는 어제의 시와 아예 모르겠는 내일의 시 사이에 심보선의 오늘이 있다”라고 평했다.

ⓒ시사IN 신선영
5월17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주기를 맞아 시민들이 추모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을 현장 인근에 부착했다.
이 밖에도 1인 출판사인 위고·제철소·코난북스가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를 주제로 협업해 펴낸 ‘아무튼 시리즈’가 출판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가을, 망원동·서재·쇼핑·피트니스·게스트하우스를 주제로 한 책 다섯 권이 동시에 나온 데 이어 연말에는 잡지·스웨터·계속이라는 키워드로 동시에 세 권이 나왔다. 참신한 기획력과 재기 발랄한 저자들의 협연이 기대된다는 평이다.

“과학을 모르는 사람이나, 과학을 ‘노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과학 마니아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가졌다”라는 ‘솔깃한’ 평을 받은 <야밤의 공대생 만화>(뿌리와이파리), “집요한 저자와 집요한 기획이 앙상블을 이뤘다”라는 <주진우의 이명박 추적기>(푸른숲)도 국내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기획 구상부터 완간까지 10년이 걸렸고, 중국에서도 번역 출간이 확정된 공원국씨의 <춘추전국 이야기>(위즈덤하우스)도 올해 10월, 11권을 끝으로 완간됐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 시대 전체를 이 정도 규모로 다룬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니 책에 담긴 열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성웅 유유 대표는 “한국의 중국 학자가 춘추전국의 전모를 다루는 역사 교양서의 최고봉이다. 이 분야에 관한 더 이상의 저작이 나올 수 있을까 싶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페미니즘은 여전히 출판계 주요 이슈


번역서 가운데 출판인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책은 식물학자 호프 자런의 에세이 <랩 걸>이었다. ‘사로잡았다’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다. “정말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어서” “섬세한 과학 교양 도서이며 대단히 아름다운 에세이” “이런 책을 기획하고 싶었다!” 같은 감탄이 <랩 걸> 뒤로 여럿 달렸다. 대개 연말에 이뤄지는 설문조사에서는 설문조사 시점과 가까운 시기에 출간된 책들이 호출되는 경향이 있는데, <랩 걸>은 지난 2월에 출간됐다는 점도 이례적이다. 저자인 호프 자런이 남성이 대표하는 분야처럼 여겨졌던 과학 분야에서 편견과 차별을 딛고 ‘살아남은 여성’이라는 점도 2017년 출판계의 페미니즘 도서 출간 열풍과 맞물려 눈길을 끌었다.

페미니즘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출판계의 주요 이슈였음을 보여주는 또 한 권의 번역서가 바로 <엄마는 페미니스트> (민음사)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의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쓴 책으로, 작고 예쁜 문고본 출판의 시발점이 된 민음사 ‘쏜살문고’ 시리즈 중 한 권이다. 김태희 사계절 기획편집부 총괄팀장은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이 책의 제안들은 적극 실천하고 싶어질 것이다. 특히나 아동·청소년 책을 만드는 편집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원고를 들여다볼 때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거라 확신한다”라는 추천을 덧붙였다.

<힐빌리의 노래>(흐름출판)와 <미국의 반지성주의> (교유서가)는 ‘짝꿍 책’으로 묶어도 좋을 듯싶다. <힐빌리의 노래>는 미국판 ‘태극기 부대’라 할 미국 백인 보수 하층민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로, 트럼프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가난을 사회적·경제적 궁핍이 아닌 정서적·관계적 결핍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임을 저자의 삶으로 증명한다”라는 평이다. 기득권 엘리트에 대한 혐오가 반지성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적절한 시점에 도착한 <미국의 반지성주의>(교유서가)는 “50년 전 책을 이렇게 시의적절하게 소환하다니”라는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1964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으로 출간 후 반세기 만에 국내 초역됐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몸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절실한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아픈 몸을 살다>(봄날의책)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잘 모르는 환자와 간병인의 세계에 관해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진지하고 성실하게 써내려간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 편집자는 “아팠던, 아픈, 아플 사람, 결국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라고 말했다.

‘문단의 아이돌’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전 2권, 문학동네) 역시 출판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작품마다 반복되는 수십억원대의 ‘묻지 마 선인세’ 논란과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가 이 책을 주목한 주요 이유였지만 “소설의 본령인 읽는 재미를 여전히 선사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하루키 소설이 어떻게 완성되어가는지를 보여줬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시대에 사람들이 몰스킨 노트, 아날로그 시계, LP 레코드, 필름 카메라 등 아날로그에 주목하는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한 <아날로그의 반격> (어크로스)은 ‘외서 기획의 정석’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도 <사악한 책, 모비 딕>(저녁의책)은 “위대한 고전 속으로 떠나는 여행길에 앞서 근력을 키워주는 스트레칭 같은 책”, <실크로드 세계사>(책과함께)는 “1024쪽의 ‘벽돌 책’도 이렇게 짜임새 있게 쓰면 읽는 용도로 쓰인다”라는 재치 있는 평을 받았다. 유발 하라리는 지난해 <사피엔스>(김영사)에 이어 올해도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호모 데우스>(김영사)를 추천하며 “유발 하라리를 읽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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