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사이트에 따르면 2017년 12월 현재 국내 학술지는 총 5424종에 이른다. 학술지(학회)는 보통 간사(총무·편집) 두 명을 두고 있으므로 대략 대학원생 1만여 명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간사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들의 노고를 감히 ‘간사 노동’이라 칭하려고 한다. 물론 학문 분야마다, 학회마다 노동환경과 처우가 다르기 때문에 간사 노동은 이런 것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돈 한 푼 못 받고 일하는 간사가 있는가 하면, 연봉 계약을 맺고 직원에 가까운 개념으로 일하는 간사도 있다. 학회 간사의 임금은 해당 학문 분야가 얼마나 돈이 되는지를 드러내는 척도이기도 하다.
몇 년 전, 박사과정 중이던 나는 100만원의 ‘연봉(월급이 아니다!)’을 받고 한 학회의 총무간사로 일했다. 주된 업무는 학술대회 준비와 학회지 발송, 그리고 회원 관리였다. 학술대회가 연 2~3회, 학회지 발간이 연 3회씩 있었으므로 대략 두 달에 한 번씩 일거리가 몰려왔다. 대학원 수업 및 조교 업무와 병행해야 했으므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그해는 하필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상영할 영상을 만드느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독학해야 했다. 영상 마지막에 엔딩크레디트와 함께 학회 회원들 이름이 쭉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사람 다리가 걸어가는 모양으로 만들어달라는 어떤 임원의 부탁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 스킬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연봉 100만원짜리 간사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내게 간사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던 교수는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힘들겠지만 이번 기회에 학계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될 거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2년 동안 간사 일을 하면서 다른 대학 연구자들을 많이 알게 됐다. 문제는 그들이 나를 ‘동료 연구자’가 아닌 ‘간사’로만 기억한다는 점이었다. 간사 임기가 끝나고 몇 달 뒤, 그 학회에서 개최한 학술대회를 참관하러 갔다. 그날따라 일이 바빠 보여서 테이블을 나르고 장내를 정리하는 등 조금 일손을 거들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한 연구자와 마주앉았는데,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간사님 수고하셨어요. 어쩜, 옷도 딱 간사처럼 입고 오셨네.” 나는 그날 입었던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를 다시 입지 않는다.
학문공동체에 대한 증여와 호혜의 환상
내가 그랬듯 간사 대부분은 학회 임원직을 맡고 있는 교수 또는 선배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자발적 타의’로 선발된다. 그 보상은 불분명한 성취감, 학문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의 재확인 등으로 주어진다. 대학원생들, 젊은 연구자들을 이 (준)무급노동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논리는 무엇인가? ‘학문공동체에 대한 증여와 호혜의 환상’이 그 핵심이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는 무관한 일들, 예컨대 학회지 발송 작업이나 학술대회 명찰 제작 등 단순 작업을 하면서도 ‘지금 내(네)가 하는 일이 학문공동체 전체를 위한다’라는 환상을 갖게 만드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학문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 곧 사회적 지위 획득과 경제적 보상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에 대한 기대심리가 깔려 있다.
이제 그 시스템은 대단히 위태로워 보인다. 많은 대학에서 강사 자리가 급감하고 있으며, 매년 줄어드는 학령인구는 대학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 학문공동체 내에서 증여와 호혜의 환상도 깨지려 한다. 이제는 당당하게 ‘간사 노동의 교환가치’를 주장해도 되지 않을까? 최소한 최저임금만큼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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