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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깨운 홍어장수 이야기

2018년 01월 09일(화) 제538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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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여 년 전 문순득은 흑산도 부근 바다에서 표류해 유구(오키나와), 여송(필리핀) 그리고 중국 등을 거치며 다양한 풍속을 경험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때는 1805년 1월, 3년여간 유랑을 마치고서였다.

새해다. 새해마다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내걸지만 대개 작심삼일에 그치는 게 보통 사람들이지. 하지만 기억하렴. 작심삼일이라 하더라도 결심을 포기하지 않고 작심삼일 백 번을 하면 1년이 가는 거란다. 하다가 중단하는 건 자랑할 일이 못 되지만 아예 마음을 먹지 않는 것,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게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다. 강철 같은 의지를 애초부터 가진 사람은 드물어. 때로는 낙담하고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결심하고 발버둥을 치면서 의지는 점점 굳어지는 거야. 새해를 맞아 아빠는 불굴의 한국인(조선인이거나 고려인, 혹은 신라인일 수 있겠다) 몇 명을 네게 소개해주려 해. 1979년 7월 전라남도 인근의 다도해에는 한 떼의 학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어. 이름하여 ‘낙도(落島) 종합 학술조사단’. 그때껏 잘 조사되지 않았던 외딴섬의 자연환경과 생태계, 문화유산, 각 섬의 독특한 습관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기 위한 여정이었지.

흑산도 옆 우이도라는 섬에서 ‘보물’이 나왔어. 섬 주민 문채옥씨 집에 있던 뒤주의 고서 더미에서 참으로 진귀한 기록 하나를 발견한 거야. <표해시말(漂海始末)>. 바다를 표류한 이야기의 전말이란 뜻이다. 이 표류기의 주인공은 문채옥씨의 5대조, 문순득이라는 사람이었어. 그의 표류담을 당시 흑산도에 귀양 와 있던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정리한 것이었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1802년 문순득(위 왼쪽)은 풍랑을 만나 일본 유구까지 밀려갔다.
ⓒ문화재청 제공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그의 표류담을 정리해 <표해시말>을 썼다.

문순득은 오늘날에도 유명한 흑산도 홍어를 잡아 팔던 어부이자 상인이었지. 스물다섯 살이던 1802년 1월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유구(琉球·류큐), 즉 오늘날의 오키나와까지 흘러가게 됐어. 유구국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와도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던 곳인지라 우리나라 사람이 유구 땅까지 밀려오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표류자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어. 여기까지는 문순득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을 거야. 9개월 뒤인 10월7일 유구국 관리들과 함께 중국 가는 무역선에 탈 수 있었으니까. 또 한 번 불운이 닥쳐왔어.

항해 시작 바로 다음 날이었지. “서풍을 만나 10여 일을 어디로 가는지 모르다가 다시 북동풍을 만났다.” 또 한 번 표류하게 된 문순득 일행이 당도한 육지는 여송(呂宋·루손), 즉 필리핀이었어. 문순득 일행 중 15명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선원들처럼 조심스레 육지에 상륙했어. 당장 마실 물이 필요했거든. 돌아온 사람은 9명이었어. 현지인들에게 6명이 붙잡혔고 가까스로 몸을 피한 나머지만 도망쳐온 거지. “여송의 동북에는 다섯 섬이 있어서 배로 13일을 가니 보였는데 풍속을 알지 못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문순득 표류 연구> 최성환 지음, 민속원 펴냄).”

유구국 사람들이야 대충 필리핀을 알고 있었겠지만 문순득으로서는 루손 섬이고 필리핀이고 생전 처음 듣는 지명이었을 테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생판 낯설었을 거야. 우여곡절 끝에 문순득 일행은 루손 섬 북서부의 일로미라는 곳에 상륙했는데 이곳에서 필리핀에 터 잡고 살던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숨 돌리게 돼. 그로부터 넉 달 뒤 또 한 번 황당한 일이 펼쳐진단다.

문순득이 탄 배는 중국으로 가는 공식 조공선이었고 조선 표류민들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임무를 지닌 유구국 관리가 타고 있었어. 이 관리는 한시라도 빨리 중국으로 가 임무를 마치기를 바랐지만 그 배에 탔던 중국인들은 천하태평 ‘만만디’였어. “바람이 순풍이어야 가지요, 한 두어 달 뒤에 가지요, 뭐.” 중국인들은 어차피 필리핀에 사는 화교들의 지원으로 배 두드리며 지낼 수 있었지만 그 비용은 몽땅 유구국인들이 부담해야 했거든. “중국인들은 중국과 유구 간의 국제관계에 따라 표류인의 송환 경비를 유구에서 무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악용하는 상황(위의 책)”이었던 거야. “하루에 소 한 마리를 잡는” 정도의 ‘융숭한’ 대접은 좋지만 그게 다 자기들 주머니에서 나가는 거였으니, 유구국 관리들은 얼마나 속이 탔겠니. 세계 3대 상인이라는 명성에 충실하게 중국인들은 루손에 체류한 넉 달 동안 유구국 관리로부터 은전 600량을 체제비로 받아 챙겼단다. 

ⓒ연합뉴스
전남 신안군 우이도 우이도항에 세워진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었던가 봐. 유구국 관리들은 표류자들을 압박해 중국인 4명과 조선인 5명(여기에는 문순득의 작은아버지도 포함돼 있었어)을 배에 태우고 나머지 27명(조선인은 두 명)을 여송에 두고 훌쩍 닻과 돛을 올리고 떠나버렸어. 문순득은 만리타향 여송으로부터 자신을 송환해줄 유구국 관리에게도 버림받은 채 국제 미아가 된 거야. 얼마나 막막했겠니. “이 사실을 알았다면 비록 유구국 배에서 죽더라도 어찌 작은아버지를 따르지 않았겠는가. …유구국 배를 잃고 뒤에 남겨져 먹고살 방법이 없었다.” 두 번씩이나 표류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버려지다시피 남은 문순득은 이 암담한 상태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어. 도무지 고국 땅에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도 문순득은 노끈을 꼬아서 더듬더듬 필리핀 말로 장사를 하고 어설픈 중국어로 중국인들 쌀 무역을 거들며 생을 이어갔단다.

또 그 와중에 천연덕스럽게 필리핀이라는 생면부지의 풍경과 사람들을 머릿속에 담았어. “남녀의 피부색이 검푸른 사람들은 자식도 그렇고, 피부가 흰 사람들은 역시 자식도 희다”라면서 식민 통치하의 필리핀을 묘사하기도 했고, “세 끝이 뾰족한 젓가락” 즉 포크로 식사하고 투계(鬪鷄)를 좋아하던 필리핀 사람들, 그리고 100개가 넘는 필리핀 단어들을 뇌리에 간직하게 된단다. 그렇게 몇 달을 고생해서 번 은전 큰 것 12개로 마침내 문순득은 중국 광동(광둥)으로 가는 무역선에 올라탈 수 있었어. 그는 오늘날의 마카오에 도착한 최초의 한국 사람이 되었고 마카오를 지배하던 포르투갈과 중국 관리들의 심문을 거쳐 중국을 남북으로 종단해 북경(베이징)에 온 조선 사신들을 만나 귀국길에 오르게 돼. 그가 고향 우이도에 돌아온 건 1805년 음력 1월8일이었어. 무려 3년여간 표류하고 유랑한 끝이었지.

조선 천지에서 가장 넓은 세상을 누빈 사람

조선 사신은 기막힌 여정을 거쳐온 문순득에게 이런 시를 준다. “흑산도 민속은 매우 어리석어 바다에서 이익을 쫓느라 매우 곤궁하구나. (중략) 원하노니 고향에 가거든 농가에 안식해서 농사나 지으시게.” 당시 조선 팔도에서 오키나와(유구국)와 필리핀과 마카오를 거쳐 중국을 가로지르고 중국인·스페인인·포르투갈인들과 실제로 부딪쳐본 유일한 사람이었을 문순득에게 “바다에서 고기 잡으니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느냐? 농사나 지어라”고 훈계한 셈이야. 그러나 문순득은 그 고생을 하고도 농사지으며 땅에 머물지 않았어. 흑산도에 귀양 와 있던 정약전을 만나 <표해시말>을 남기게 된 것도, 제주도에 표착했으나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어 송환되지 못한 채 억류돼 있던 필리핀인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계속 바다를 누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문득 홍어장수 문순득의 생김새가 궁금해지지 않니? 의지가 굳은, 그러면서도 넉살도 좋고 눈썰미도 뛰어났던 궁벽진 섬의 어부, 당시 조선 천지에서 가장 넓은 세상을 누빈 그가 어떻게 생겼을까 아빠는 궁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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