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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대동법’을 외치다

2018년 01월 17일(수) 제539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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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곡 김육은 평생 대동법 실시에 대한 집념을 보였다. 조선 백성에게 대동법은 타는 목을 적시는 한줄기 소나기였다. ‘대동법이 없었다면 조선은 18세기에 이미 19세기 상황을 맞았으리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 사람의 집념은 자신을 바꾸고 그 가족의 미래를 변화시킨다. 또 한 사람이 한 나라를 책임지는 정치인이거나 재상이라면 그의 집념은 수백만명의 운명을 바꿀 수 있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집념을 불태운 ‘높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계 역사에서 빗자루로 쓸어낼 정도로 많단다. 하지만 나라의 미래를 바꿀 만한 과제를 위해 집념을 불태운 사람은 그렇게 흔한 편은 아니야. 오늘은 이런 ‘집념의 조선인’ 재상 한 명을 소개해주려 한다. 잠곡 김육(1580~ 1658)이야.

ⓒ연합뉴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잠곡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통해 백성의 삶을 개선했다.

김육이 태어난 해를 보렴. 1580년생이면 그가 열두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임진왜란. 몽골 침략 이후 최대 지옥도가 조선 팔도를 뒤덮었어.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 살던 김육의 가족도 피란을 떠났지. 피란처를 전전하던 도중 아버지가 병들어 죽고 뒤이어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아. 묘를 조성할 사람들을 살 여유조차 없던 김육은 직접 땅을 파서 부모를 모셨다고 해. 소년 가장 김육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했어. 숯을 구워 남양주에서 동대문까지 40리 길을 져 나르며 장사를 해서 동생들을 먹여 살렸다고 하니까.

이후 과거에 급제하고 성균관에도 입학했지만 광해군 때 권력자였던 정인홍에게 맞서다가 쫓겨나고 말아. 김육은 두메산골인 경기도 가평 잠곡이라는 곳에서 토굴을 파고 움막을 지어 연명했단다. 자녀는 2남4녀. 움막집에서 여덟 식구가 복닥거리고 살았으니 흥부네가 따로 없었겠지? 그 기억 때문일까. 김육은 호를 ‘잠곡’으로 지었어.

이런 김육에게 기회가 온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이 쫓겨나고 정인홍 등 대북(大北)파가 몰락한 거지. 나이 마흔세 살에 벼슬살이를 시작한 그는 공자 왈 맹자 왈에 능한 선비들과는 좀 질적으로 다른 위인이었어. “나는 멍청해서 학문이 뭔지 잘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른 마음으로 실질적인 일을 하는 것이고, 쓰는 것을 줄여 백성을 사랑하고 요역을 줄여 세금을 낮춰주는 일이다.”

이런 김육이 평생 집념을 불태우며 이루고자 한 소망이 있었어. 바로 대동법이야. 조선의 세금 제도 가운데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貢納) 제도는 그 폐해가 특히 심했어. 꿀, 밀, 잣, 감, 오배자, 겨자, 짐승 가죽 등등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이면서 의식주에 소요되는 광범위한 물건들을 나라에 바쳐야 하는 제도였지. 문제는 이 특산물이 지천으로 나는 게 아니었고 전문적으로 구하고 다녀야 얻을 수 있는 물건이 많았다는 거야. 거기에 자기 동네에선 전혀 나지도 않는 특산물을 부과받는 황망함은 덤이었지.

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방납(防納)이야. 방납인들이 공납을 납부해야 하는 백성들 대신 공물을 마련해 나라에 내고 농민들한테 그 대가를 받는 방식이지. 농민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납을 하고 방납인은 그를 통해 합당한 이익을 취하면 좋았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 그러니. 방납인은 농간을 부렸고 부패한 관리와 긴밀한 사이가 됐지. 어떤 탐관오리는 백성들이 공납품을 구해 바치면 질이 낮다거나 양이 적다는 이유로 물리치기도 했다. “어허 왜 쉬운 일을 어렵게 하는고.” 결국 백성들은 ‘꿩 한 마리를 바치는 데 쌀 8말, 생선 한 마리를 바치는 데 쌀 10말의 방납가를 물어야 했다(<17세기, 대동의 길> 한명기 외 지음, 민음사 펴냄)’.

“신은 대동법밖에 할 말이 없는데…”


대동법의 핵심 중 하나는 개별 가구에 부과되던 특산물, 즉 공물 납부의 의무를 토지에 부과하는 방식이었어. 땅을 가진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내게 했지. 호족이나 지주에게는 난데없는 ‘세금 폭탄’이었어.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신흠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소민(小民)은 편하게 여기는데 달갑지 않게 여기는 쪽은 호족(豪族)들이다’고 합니다. 말이야 근사하나 대가(大家)와 거족(巨族)이 불편하게 여기며 원망한다면 이 또한 우려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니? 서민들이 좀 힘들다고 부자들을 불편하게 하면 되겠냐는 뜻이었지.

ⓒ문화재청 제공
효종 10년에 세운 대동법 시행기념비.
대동법을 실시한 삼남(충청·경상·전라)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충청도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려 했지만 이런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어.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왕위에 올랐어. 당시 김육은 일흔 살이었어. 효종은 김육을 놓아주지 않았고 김육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 당시 효종에게 한 얘기를 들어봐. “신은 대동법밖에 할 말이 없는데 이것이 시행되면 좋겠지만 만약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신은 노망난 늙은이가 되고 맙니다.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숫제 “대동법이냐 아니냐 양자택일을 하시오”라고 임금에게 들이대는 격이었지. “이 일은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하여야지 흉년이 들면 또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풍년도 들고 즉위도 하셨으니 이런 개혁은 단번에 해야지 질질 끌면 결국 실패한다는 채근이었어. 이런 김육에게 정적(政敵)이 좀 많았겠니. 

김육은 정치적 처신에도 능한 인물이었어. 대동법 극렬 반대자 중에 원두표라는 사람이 있었어. 효종 2년 원두표는 대동법 주무 관청인 호조의 판서였단다. 당시 영의정 김육은 원두표를 이렇게 몰아붙인다. “사람이 없어서 이 사람에게 재무를 맡기십니까. 대동법 논의 이후 한 번도 저와 의논한 적이 없었습니다.” 2년 뒤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육이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강원도 김화에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원호와 병자호란 때 역시 같은 곳에서 전사한 홍명구를 함께 기리는 사당을 지으소서.” 이 기사 뒤에 사관은 짐짓 한마디를 덧붙여놨어. “원호는 공조판서 원두표의 할아버지다.” 효종이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고 타박할 만큼 쇠심줄 고집의 김육이었지만 자신의 집념에만 매달리지 않고 상대와 ‘밀당’을 하는 유연함도 지녔던 거야. 김육의 유연함은 그 집념의 순수성을 오롯이 드러냈고 송시열 등 반대자들도 효용을 인정하게 될 만큼 대동법은 그 빛을 발했지.

김육은 유언까지도 대동법이었어. “신의 병이 날로 깊어만 가서 실낱같은 목숨이 얼마 못 버티고 끊어질 것 같습니다. 신이 만약 죽는다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신경을 쓴 곳이 바로 곡창지대 전라도였어. 그는 자신이 믿는 이를 감사로 추천하면서 호남의 대동법 실시에 대한 집념을 보였으니까. 효종이 이미 그렇게 임명했으니 몸이나 돌보라며 달랠 만큼.

백성에게 “밥은 하늘”이라고 했다. 제도의 모순 아래 신음하던 조선의 백성에게 대동법은 타는 목을 적시는 한줄기 소나기였고, 기득권보다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방점을 찍었던 민생 정책의 힘을 보여주었어. “대동법이 성립되지 않았다면 조선은 18세기에 이미 19세기 상황을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오겠지(<쟁점 한국사> 이정철 외 지음, 창비 펴냄). 너는 역사를 공부하며 “어떻게 이걸 참고 살았지?” 투덜거리곤 하지. 방납에 허덕이던 조선 백성들을 불쌍해하면서 말이야.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은 우리 시대를 두고 혀를 찰지도 몰라. “어떻게 상위 10%가 하위 75%보다 더 많은 자산을 보유할 수가 있지? 평생 일해도 집 한 채 못 사는 나라를 어떻게 참았지? 왜 저때는 김육 같은 사람이 없었던 거야?” 하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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