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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기는 쉬운 방법

2018년 01월 18일(목) 제539호
문정우 기자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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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일본과 비교해 한국이 어지간히도 복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도 아니면서 강대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고 그 때문에 내란도 겪었다. 패전하고도 국토를 온전히 지킨 일본은 한국전쟁을 틈타 빠른 시일 안에 경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우리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을 바라보며 식민통치에 이어 두 번이나 능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일본이 전처럼 커 보이질 않는다. 경제와 사회 지표는 아직 한국이 일본을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말하지만 들여다볼수록 저 나라는 속이 곯았다. 과거에 저지른 죄악에 대가를 톡톡히 치르리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이 나라는 군국주의를 깔끔하게 청산하지 못해 폭력적인 국가 가부장제인 천황제의 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오죽하면 1인당 국민소득은 최상위권이면서도 성평등지수는 OECD 국가 중 바닥을 기겠는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여성의 남성 혐오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런 가부장제 풍토에서라면 정치가 유력한 집안의 가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정치 냉소와 급속한 고령화가 겹쳐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약진이 위험수위를 넘었다. 인권·평등·평화의 교두보 구실을 하던 진보 세력은 젊은 세대의 유입이 끊기는 바람에 거의 씨가 말랐다. 이대로라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일본의 아베 정부가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면 합의를 한 것 역시 이 나라의 상태를 말해준다.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전시 성노예’라는 본질적 진실 표현을 포기하고 소녀상 이전을 약속한 이면 합의는 피해자 기념과 존중을 명시한 유엔 국제인권법에 명백하게 반하는 행위이다. 일본 정부는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없던 일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일본 외교는 우경화라는 우물에 갇히고 말았다.

아베 총리가 이면 합의 사실이 드러난 뒤 1㎜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뻗댄 것은 당사자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일본 언론 대다수가 자기 정부 감싸기에만 바빴던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다. 자기네 정부가 범죄를 모의하듯 밀실에서 전쟁 피해자를 다시 욕보이는 합의를 했다는 걸 비난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 놀랍다. 국수주의가 주류를 이룬 사회가 건강한 민주주의를 꽃피울 리 없다.

ⓒ한성원 그림

일본 황군이 반인륜 단체였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후발 제국으로서 군대를 압축 성장시켜야 했던 일본은 시계조차 볼 줄 모르던 문맹의 농촌 청년을 당장 전투에 투입할 근대적 군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런 필요 때문에 지휘관들의 조장과 묵인 아래 고질적인 구타와 가혹 행위가 일본군 내에 자리 잡았다. 서구 열강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졌던 일본은 기계화를 포기하고 정신 무장을 택했다. 이른바 ‘까라면 까라’가 일본군의 구호가 된 것이다. 보급도 현지 조달을 원칙으로 삼아 2차 세계대전 중 적의 손에 죽은 병사보다 굶어 죽은 병사가 훨씬 많을 지경이었다.

만연한 불만과 공포를 잠재우려고 만들어 배급한 게 마약이었다. 황군의 초급 장교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중국군을 향해 군도를 빼들고 앞장서 ‘도쓰게키(돌격)’를 외치며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히로뽕(필로폰)에 취해서였다. 황군에게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군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또 하나의 마약이 있었는데 그것은 섹스였다. 일본군은 국내는 물론이고 조선과 같은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여성 수십만명을 조달해 사병들에게 ‘천황의 선물’로 주었다.

어디든 군을 따라다녔던 이 위안부 집단을 일본은 황군과는 상관없는 조직이었다고 아직까지 우긴다. 일본인 위안부들의 증언에만 의지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다는 주장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동안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유럽의 여성들까지 미성년자도 가리지 않고 인신매매 조직이 강제로 끌어갔다는 숱한 증언이 쏟아졌는데도 귀를 막고 있다. 군이, 결국 국가가 관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었다는 걸 일본인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자국의 여성들에게도 잘못했다고 빌어야 옳다. 국민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전쟁 통에 가뜩이나 고통받으며 헤매던 가난한 계층의 여성들을 막다른 길로 유도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제대로 고백하고 반성하지 않아 지금의 일본 여성도 불우하다고 생각한다. 망각, 회피, 부정, 왜곡….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을 닮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 ‘피해자 중심’의 접근에 충실하겠다는 방침인데 그게 생각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식은 자신들의 피해 저 너머까지 확장돼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끊임없이 단순한 피해자에서 세계사의 증인으로 스스로를 격상해왔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봤듯이 자신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으며 전 세계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고 국가폭력에 경종을 울렸다. 할머니들은 한국의 기지촌 여성들의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지원했으며, 한국 군인에게 강간당한 베트남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금을 모았다. 이런 폭력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일본 황군의 악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은 불행하게도 한국군이었다. 신생 한국군의 지도부로 변신한 일본군, 일본의 괴뢰였던 관동군 출신은 황군의 문화를 한국군에 고스란히 이식했다. 군대 내 폭력과 인권유린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60년이 넘는 동안 비전투 인명 손실이 6만명에 달한다. 한국군은 1970년대까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도 매년 1000명이 숨지는 믿기 힘든 기록을 세운 것이다. 덧없이 스러진 값진 젊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과거를 청산하는 게 단순히 피해자의 명예 회복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한국군은 6·25 때, 일본군처럼 위안소를 운영했던 전력도 있다.

일본 황군의 악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한국군

일본 황군이 만든 위안소를 접수한 것은 한국을 점령한 미군이었다. 용산 미군기지는 일본군의 조선군 사령부 자리였다. 평택도 일본군이 비행장 터를 닦던 곳이었다. 한국에서 미군은 공공연하게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주둔 지역 주변 매춘 조직을 유지하고 확대했다. 한국전쟁 중에 <부산일보>는 “시 당국은 연합군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유엔 위안소 설치를 이미 승인했다. 며칠 안에 마산 신시가와 구시가에 위안소 5개가 세워질 예정이다”라고 보도한 일도 있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뒤 기지촌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58년 인구 2200만명에 불과한 나라에 매춘 인구가 30만명에 달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기지촌에서 일했다. 한국 정부와 미군은 미군 전용 클럽이란 어항에 달러라는 미끼를 넣어 한국의 가난하고 불우한 여성을 몰아넣었다. 여성들은 클럽에서 폭력과 성 착취에 시달렸으며 한국 사람들로부터는 양색시, 양공주라 불리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들은 현대판 ‘환향녀’였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국 정부 역시 기지촌 여성들에게 ‘국가 포주’였다는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1971년 12월31일 한국 정부는 10개 정부 부처의 차관들을 위원으로 하는 청와대 직속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설치했다. 미군 철수 분위기를 바꾸고 기지 주변 클럽이 불결하다는 미군 측 불만을 무마하려고 한국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이 정화운동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검진을 받아야 했다. 검진증을 갖고 있지 않다가 미군 헌병에게 적발되면 즉심에 회부되었다. 성병에 걸린 여성은 모두 ‘몽키하우스(monkey house)’라는 시설에 격리되었다.

수용된 여성에게는 페니실린을 투약했는데, 내성이 생겨 투약량을 점점 늘려야 했고 부작용도 심했다. 대다수 여성이 주사를 맞으면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호소했다. 많은 이들이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혹은 화장실에서 갑자기 죽었다. 미군의 70%가 성병에 감염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외출 외박이 자유로웠다. 책임은 오로지 기지촌 여성의 몫이었다.

한국 정부가 기지촌 여성의 포주였다는 증거는 도처에 널렸다. 1969년 미군의 밤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계획도시인 군산의 아메리카타운 건설을 지휘한 사람은 백태하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었다. 이 도시는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 500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1964년 한국의 외화 수입이 1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기지촌 미군 전용 홀에서 흘러나온 달러는 그 10%에 가까운 960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 정부는 미군이 일본에 가서 돈을 쓰는 것을 막으려고 기지촌 여성에게 기본 영어와 에티켓을 가르치기도 했다.

관동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아마도 이런 짓을 하는 데 심리적 저항이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두 번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지 않았을까. 이번 일을 둘러싸고 논의는,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맴돌지만 거기서 그쳐선 안 된다. 우리 정부부터 먼저 과거와 단절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하는 한편 미군 위안부로 만들어버린 기지촌 여성, 그리고 그들을 대체한 동남아 여성들에게도 정식으로 사죄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분담금을 더 내놓으라고 몰아붙이지 않더라도 주한 미군의 미래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과거의 망령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순간 일본은 한없이 작아지게 돼 있다.

참고한 활자:<유신>(한겨레출판), <기지국가>(갈마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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