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는) 감기처럼 만연하게 퍼져 있지만 가해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성폭력·성범죄 관련법이 강화돼서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범죄 피해자 중에서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드라마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난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마녀의 법정〉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배우 정려원의 소감이다. 이 드라마에서 정려원은 ‘여성·아동범죄전담부(가상의 검찰 부서)’ 소속 마이듬 검사를 연기했다. 여성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드라마 자체가 귀하지만 이 드라마의 의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약물 강간, 불법 촬영, 친족 성폭력, 미성년자 성 매수, 연예인 성 상납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조심스러운 접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언론의 2차 가해, 수사 과정의 허점 등 피해자 처지에 공감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췄다.

고마운 이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비슷비슷한 수상 소감 사이에서 〈마녀의 법정〉이 던진 메시지를 되새기는 정려원의 그것은 화제를 모았다. 한 기사에는 ‘정려원이 아닌 마이듬의 수상 소감’이라는 제목이 붙기도 했다. 자주 목소리가 떨리고, 가끔 말을 멈추기도 했던 그 수상 소감은 분명 거물급 정치인 앞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않는 마이듬 검사의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남의 눈을 의식하는 법부터 배웠다고 고백하던, 하지만 이제는 정말 말할 때라고 결심한, 17년차 배우이자 30대 여성 정려원의 목소리였다.

ⓒ정켈 그림

정려원의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S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뒤에도 ‘건강한 제작 현장을 만들자’고 제언한 적이 있다. “관계자들이 고민해주길 바란다”라면서도 “제가 너무 주제넘은 건 아니지요?”라고 수줍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5년이 흐른 2017년, 여전히 단어 사이사이마다 긴장이 묻어났지만 정려원의 수상 소감은 더욱 단단해졌다. 제도와 인식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고, 약자를 향해 위로를 건넸다.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5년 전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한 해에만 드라마 두 편을 찍은 2012년과 달리, 〈마녀의 법정〉은 2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이었다. 여성 배우가 타이틀 롤을 맡는 일이 흔치 않기에 출연을 결심했다. “30대 후반 여자 배우는 체력이 떨어져 주인공으로 쓰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링거를 맞아가며 촬영을 마쳤다. 그렇게 버텨낸 자신이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단 몇 분을 그녀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썼다.

브라운관 너머 우리 사회를 향한 물음

2017년은 용기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줄을 이은 한 해였다. 국내에서는 SNS 해시태그를 통해, 미국에서는 ‘미 투(Me Too)’ 캠페인으로 성폭력 가해자를 고발하고 피해자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더 많은 발언 창구를 가진 동종 업계 권위자들이 침묵하거나, 도리어 가해자를 감싸거나, 약자들이 말할 차례를 가로채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마녀의 법정〉에서 마이듬은 자신의 어머니가 성고문 피해자였음을 밝히면서, “법이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피고인에게 더 냉정한 잣대를 들이댔다면 한 여자의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라고 재판부에 되묻는다. 이 물음은 사실 브라운관 너머 우리 사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작고 떨리고 끊기는 목소리라고 하더라도 세련되지 못함을 탓하기 전에, 그동안은 약자에게 이만큼의 발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이 순서일 터다. 2018년 새해를 열며 정려원이 기꺼이 나누어준 몇 분의 시간이 더 큰 용기와 위로와 반성을 부르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기자명 양정민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