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광경을 보니, ‘저 자리에 함께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안타까워지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지난해 12월16일 일본 도쿄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송신도 할머니(향년 95세)다.
192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송신도는 12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16세에는 어머니가 정해준 결혼이 죽기보다 싫어서 혼례를 치른 날 밤 도망쳐 가출했다. 대전에서 “전쟁터에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하면 결혼 안 하고도 혼자 살아갈 수 있다”라며 접근한 조선인을 만났다. 그를 따라나섰다가 일본군이 고용한 위안소 업자에게 팔리고 말았다.
더욱이 위안소까지 끌려오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인 빚이 있었다. 빚을 갚으며 군인들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해야 했다. 그래서 송신도는 필사적으로 일본어를 ‘외우고’, 열심히 일본군을 ‘위안’했다.
1941년 임신한 송신도는 한커우의 위안소로 보내져 아기를 낳았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그 핏덩이를 맡겼다. 출산 2개월 뒤에는 웨저우(岳州·웨양(岳陽)의 옛 이름)의 위안소로 이동했다. 그곳을 거점으로 전선을 이동하는 군인들과 함께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렇게 위안소와 전선을 따라 이동하던 위안부 생활의 끝을 맞이한 곳은 1945년 8월15일 셴닝(咸寧)의 위안소였다.
송신도가 일본군 위안소라는 감옥에 갇혀 끔찍한 고초를 겪은 세월이 무려 7년이다. 다른 피해자들에 비해 상당히 긴 시간이다. 이 7년은 칼에 베인 허벅지와 옆구리의 상처, 어떤 군인이 팔에 새긴 ‘가네코(金子:위안부 당시의 이름)’라는 글자 문신, 일본군의 총검에 찔리고 구타를 당해 찢긴 고막 등으로 송신도의 몸에 남았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송신도는 같이 살자는 일본 군인의 감언에 속아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결국 하카타에서 버림받는다. 그 후 재일 조선인 하재은과 만나 일본군 ‘위안부’라는 주홍글씨 위에 재일 조선인이라는 차별의 굴레를 쓰고 미야기 현에 정착했다.
“젊었을 때는 매일 밤 꿈에 군인들이 나왔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가위눌려 허우적대는 나를 하재은이 옆에서 깨워줬다. 위안소 일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술도 많이 마셔봤고 미쳐 날뛰어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울화만 더 치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왜 조선의 아이들이 끌려가 그런 고생을 해야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갔다. 일본에서 나이가 들어서는 ‘경로의 날’에 근처 노인들에게는 방석을 나눠주면서 나에게는 주지 않았다. 몇 년이나 같은 동네에 살아도 그런 것까지 차별을 했다. 근처에는 군인연금으로 잘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 유족연금을 받는 사람도 있다. 전쟁터에 끌고 갈 때는 ‘나라를 위해서’라고 해놓고선, 지금에 와서는 ‘조선인’이라고, ‘위안부’라고 차별을 한다. 내가 왜 ‘위안부’가 돼야 했는지, 왜 그런 차별을 받아야 했는지 알고 싶어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을 시작하니 ‘생활보호를 받으며 다른 사람들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무슨 불만이 있어 재판을 하느냐’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만 나쁜 놈으로 몬다, 정 불만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들 했다. 판결을 받고 난 다음에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위안소의 존재를 인정한다면서 왜 일본 정부는 과거 일을 반성하고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 못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송신도는 2003년 3월 일본 최고재판소의 기각 판결로 10년 동안 벌인 재판에서 패소한다. 그러나 웃으며 말했다. “내 마음은 지지 않았어!”
그가 지지 않았다고 말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송신도의 옆을 지켜준 ‘재일 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 모임)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고발한 분은 고 김학순 할머니다. 1991년 8월이었다. 김학순은 사회적 고발뿐 아니라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1992년 1월 ‘위안부 110번’이라는 신고 전화를 설치하는 것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개시했다. 송신도는 이 전화를 통해 재일 조선인 여성, 일본인 여성 등 다양한 관계자를 처음 만나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자’고 제안했다. 운동가들은 송신도의 의사를 존중해 1993년 1월 ‘재일 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결성한다. 다만 처음에는 ‘송신도씨와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한 회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럴 만했던 것이, 송신도는 그전에 회원들이 만난 한국의 다른 피해 할머니들과는 달리 곁을 주지 않았다. 괄괄하고 거침이 없는 성격에, 싫다 좋다 표현도 노골적으로 했다. 무엇보다 회원들이 힘들었던 것은 송신도가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원 모임의 양징자씨는 “마치 철갑을 두른 듯 바늘도 안 들어갈 정도로 틈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송신도는 다른 누구보다도 사람을 믿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자꾸 사람들을 밀어냈다. 회원들은 이런 송신도가 야속했다. 그러나 송신도의 야박한 말투에 상처를 받았다가도 언뜻 한순간 그가 내보이는 순박한 16세 소녀의 표정에 마음을 녹였다. ‘저 모습이 원래의 송신도였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회원들이 많았다.
사람을 불신했던 그녀 “당신들 있어 행복해”
첫 5년이 지나면서, 지원 모임 회원들은 인간에 대한 송신도의 뿌리 깊은 불신감을 이해하게 되었다. 16세 이후 평생, 타인으로부터 속임과 차별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송신도는 타인에게 속고 차별당해온 자신을 믿지도 못했다. 첫 5년 동안 송신도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배웠다는 것이다. 다시 배신당하고 상처받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떨쳐버렸다.
송신도는 일본 정부에 소송을 낸 뒤 여러 곳에서 초청받았다. 증언과 강연을 끝낸 다음 반드시 청중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었다. “내 말 어떻게 생각해? 진짜라고 믿어?” 그러나 세상을 다시 조금씩 믿게 되면서 송신도는 이런 질문을 다시 꺼내지 않게 되었다. 재판에서 지고도 그는 지원 모임 회원들에게 “당신들이 있어 지금 제일 행복하다”라고 했다. 자신의 피해를 말로 뱉어내며 ‘상대화’하고 그 상처를 타인에게 이해받고 교감하면서 송신도는 조금씩 ‘위안소’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왔다. 많은 피해자들이 문제 해결 운동을 통해 송신도와 같이 폭력의 후유증을 극복해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다.
송신도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기록이 남았다. 송신도와 지원 모임이 재판 투쟁 10년 가운데 5년을 다큐멘터리 영화(〈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감독 안해룡, 2009)와 책(〈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바다출판사, 2016)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송신도 할머니는 우리에게 알려진 마지막 해외 거주 ‘위안부’ 피해 생존자였다. 송신도 할머니처럼 고향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해외에서 살았을 피해자가 분명히 더 있었을 테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감추며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걸 짊어지고 ‘위안부’ 문제 해결과 존엄 회복을 위해 앞장서서 싸워온 그분들을 잊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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