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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갈았던 남자와 불씨를 지켜낸 남자

2018년 01월 23일(화) 제540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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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노다 히로는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29년 동안 필리핀 루방 섬의 밀림에서 버텼다. 조병기는 팔라우 군도의 펠레류 섬에서 11년 동안 숨어 지냈다. 둘의 생존 방식은 달랐다.

요즘은 너희가 배우지 않지만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어. 남학생들은 제식 훈련부터 총기 분해, 총검술 등 군인을 방불케 하는 교육을 받았고 여학생들은 삼각대 매기 등 유사시 ‘간호병’으로서의 역할을 익혔단다. 교련 선생님들은 대개 무서웠어. 학생이라기보다는 준군인으로 학생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재미도 있었다. 이론(?) 수업 하는 날엔 교과서와 관계없이 선생님들의 실제 전투 경험담이나 전쟁사(史)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거든. 어느 날 비 오는 교련 수업시간, 교련 선생님은 “일본인들이 밉지만 본받을 건 본받아야 한다”라면서 한 일본인 얘기를 들려주셨어. 오노다 히로라는 이름이었지.

ⓒAP PHOTO
29년간 필리핀 루방 섬 정글에서 버티던 오노다 히로 전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한 일본군 장교야. 드넓은 태평양 곳곳에서 대포와 폭탄이 불을 뿜었고 큼직한 섬나라부터 이름도 제대로 붙여지지 않은 작은 섬들까지 피비린내에 뒤덮였다. 오노다 히로는 루방 섬이라는 필리핀의 작은 섬에 투입돼 그곳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당시 일본군은 포위되거나 전세 역전의 희망이 없는 경우 전원 총검을 들고 “돌격”을 부르짖으며 빈틈없이 늘어선 미군의 기관총 앞으로 달려들다가 죄 쓰러지고 마는 이른바 ‘옥쇄(玉碎, 옥처럼 깨어진다는 뜻)’를 감행하곤 했는데 오노다의 사령관은 좀 색다른 명령을 내려. “항복도 옥쇄도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싸워라.”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 의미도 없는 자살 공격을 감행하는 일본군의 광기를 보고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 정신 상태를 분석하기 위해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연구 의뢰를 해서 나온 책이 유명한 <국화와 칼>이야. 오노다 히로 소위도 미국인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광기의 포로 중 하나였지.

광기의 특징 중 하나는 집착이야. 오노다 히로는 죽지도 항복하지도 말라는 명령에 집착했고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한 뒤에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패잔병 몇 명과 함께 전쟁을 지속한단다. 그중에 “전쟁이 끝났다”는 필리핀 정부의 호소에 항복한 사람도 있고 필리핀 정부군에 사살된 사람도 있어서 혼자 남게 되지만 오노다 히로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밀림에 숨어 그만의 전쟁을 이어가.

1974년 오노다 히로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낀 일본인이 밀림 속으로 들어가 오노다를 만났고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설득하게 돼. 일본이 항복한 건 이해했지만 오노다는 직속상관의 명령 없이는 항복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끝내 그 상관이 필리핀까지 날아와 투항명령서를 전달한 뒤에야 항복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단다. 그는 일본에서 영웅이 되었지. 그런데 그 이유를 아빠는 교련 선생님으로부터 생생하게 들었단다.

“그때까지도 오노다 소위의 총검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수십 년 동안 그 칼을 갈고 닦았던 것이다. 이런 것이 군인정신이다. 일본인들이 가진 사무라이 정신이다. 일본이 밉지만 그 정신은 여러분이 본받아야 한다.” 침을 튀기며 목소리에 열기를 돋워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마치 일본인이 된 듯 오노다의 군인정신을 찬양하던 그 모습이.

병 세 개와 나뭇가지로 만든 달력

그런데 오노다 히로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이미 끝난 전쟁터에 숨어 살아야 했던 한국 사람이 있다. 아니 조선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1955년 7월5일 오후 6시20분. 말쑥한 양복에 파나마 모자를 쓰고 짐 보따리를 두 손에 바리바리 든 여행객 하나가 부산항에 도착했어. 기자가 지금 누가 가장 보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더듬더듬 일본어로 대답했지. “아내와 아들 보형이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1942년 징용에 끌려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남양군도 파견 노동자로 지원한 한국인이었지. 그가 도착한 곳은 요즘 관광지로 유명한 팔라우 군도 중의 하나인 펠레류 섬. 참으로 안된 일은 미군이 그 섬을 총공격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는 사실.

ⓒGoogle 갈무리
1955년 7월5일 1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조병기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미군이 상륙하자 태평양전쟁에서 늘 벌어지던 풍경이 펼쳐졌어. 일본군의 발악적인 저항과 미군의 소탕전. 일본군이 모두 죽거나 항복한 뒤에도 펠레류 섬의 숲속에 숨어 살던 사람들이 있었어. 조병기를 비롯한 한국인 노동자 3명이었지. “미군들은 코와 귀를 자르고 혓바닥을 빼낸다”라는 일본군의 악선전을 그대로 믿었던 그들은 숲속에 들어가 숨어 살았던 거지. 단양, 영월, 제천 출신이었던 그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영월 출신인 다케노(창씨개명한 이름)는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제천 출신의 한 사람은 행방불명이 되었어. 남은 이는 조병기 하나였단다.

이후 그는 그야말로 로빈슨 크루소의 삶을 살게 돼. 미군들의 모래자루를 훔쳐 옷과 침구를 만들었다. 또 원주민들이 재배하는 다베오깡이라는 작물을 훔쳐 먹었고 만만한 달팽이와 산 게를 잡아먹으며 아사를 면했다고 해. 오노다 히로는 ‘전쟁’을 치를 무기라도 가지고 있었지만 조병기는 아무런 무기도, 도구도 없었어. 하지만 그는 오로지 생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11년을 버텼어.

“우연히 산속에서 미군용 성냥을 주워 이때부터 불씨를 만들어놓고 화식(火食:불에 익혀 먹음)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1947년 4월경이다(<동아일보> 1955년 7월7일자).” 그런데 조병기는 어떻게 불씨를 얻은 시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을까? 그의 놀라운 발명품(?) 덕이었어. “세월이 흐르는 것을 계산하기 위해 주워다놓은 병 세 개에 나뭇가지를 가늘게 쪼개어 날수를 세도록 병에다 매일 하나씩 더하고 다시 그 병에 서른 개가 모이면 달수를 세는 병에다 하나를 더 넣고 다시 그 병에 나뭇조각 하나를 더 넣는 방법을 써서 개인 달력을 만들었다(위 신문 기사 중).”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소금의 경우 바닷물을 떠와서 달팽이 ‘곰국’을 끓여 간을 맞췄다니 실로 눈물겨운 생존과 귀향을 향한 의지 아니었겠니.

오노다 히로 소위는 29년 동안 필리핀인 30명을 죽였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원주민 가옥 전체를 불 지르는가 하면 사람을 토막 내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그는 99식 소총과 탄환을 29년 동안이나 보관하면서 상시 사용 가능하게 보관하고 있었지. 반면 일본인들에게 끌려갔던, 또는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준다는 꾐에 빠져 일선의 섬에 처박혔던 노동자 조병기가 10년이 넘도록 목숨을 걸고 간직했던 것은 불씨였어. 달팽이 같은 것들을 날로 잡아먹으면서 배탈이 나자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처음 불씨를 얻은 이래 11년 동안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단다. 적어도 아빠는 총칼에 기름칠하며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서슴지 않으며 ‘전쟁’에 집착한 이보다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소중한 불씨를 단 한 번도 꺼뜨리지 않고 지켜냈던 조병기의 집념에 더 눈길이 가는구나.

돌아왔을 때 부인은 이미 개가해버리고 아들 하나만 그 곁에 남았으며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교장 선생님이 서울 자신의 학교 소사로 취직을 알선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 그러나 “아무도 내 처지를 돌보지 않았던 것을 원망하지 않겠다. 남양군도에서 살아온 고생만큼 견딜 수 있다면 남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경향신문> 1955년 8월23일자)”라는 그의 다짐과 “유명해졌으니 국회의원 한번 출마하시오” 하는 기자의 농담에 “나라고 못할 거 있겠소?”라고 받아치던 여유로 비추어 ‘의지의 한국인’ 조병기가 행복한 여생을 살았으리라 짐작해본다. 아니 기원해본다는 편이 맞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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